입사 후 처음으로 들어간 팀에서나는 판매 목표와 진척 현황을 매주 보고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원래도 숫자에 약한 편이라 숫자를 다루는 업무는 늘 긴장해서 임해도 실수가 생기곤 했다. 그날도 임원 보고를 앞두고 몇 번을 점검했는데, 보고 직전에 몇 부의 프린트를 하고 나서야 숫자가 약간 틀린 걸 발견했다.
아, 어떡하지?몇 번을 봤는데 왜 몰랐지? 난 대체 왜 이 모양이지?... 당장이라도 스스로를 쥐어박고 싶은 표정을 한 나에게, 사수 선배가 말했다.
"숫자 차이가 커? 음... 얼마 안되네. 야, 괜찮아. 쫄지마! 대세에 큰 지장 없어."
그 말을 하는 사수는 마치 숙련된 주방장처럼 능숙해 보였다. 이 정도 오차는 본인이 보고하면서 '매니지' 할 수 있다고 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이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라고.
그날 사수는 본인의 말 그대로 훌륭하게 그날의 발표를 '매니지'했다. 그는 어떻게 발표를 이끌고 가야 하는지, 윗사람이 정확히 뭘 궁금해 하는지 알았다. 그가 주도하는 발표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아무도 틀린 숫자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일당백의 전장에 선 장수처럼 발표를 마치고 나서 나에게 오늘 수고했다고, 자료 배포 전에만 숫자를 수정하라고 일러주었다.
와, 사람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긴 처음이었다.
그 뒤에도 선배들로부터 "괜찮아, 대세에 큰 지장없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주로 뭔가를 지나치게 오래 붙잡고 있을 때였다. 퇴근도 못하고 엑셀 파일 앞에서 혼자 끙끙대면서, 대체 집에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 싶어 속이 타들어가던 날을 기억한다. 한 선배가 아이고- 하면서 옆에 앉더니 마우스를 가져가 슥슥 파일을 수정해 주며 말했다. "이런 건 그냥 빨리 시간 맞춰서 내는 게 중요하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대세에 큰 지장없어."
나의 작은 실수와 버벅거림 앞에서 누군가가 이런 것쯤은 아무 문제 안 생긴다고, 대세에 지장없다고 말해준 덕분에 나는 아직도 회사에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대세에 지장없다는 말의 또 다른 용례가 있다. 디테일을 지적하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그건 무시해도 될 만한 작은 차이임을 강조할 때 쓰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상무: 근데, 이러이러한 부분도 같이 고려해 봐야 하지 않나? ~한 경우는 어떡하라고?
부장: 네 상무님, 그 부분은 저희도 고려해 봤습니다. 그럴 경우 약간의(n프로 등 대강의 숫자를 곁들인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 정도는 대세에 지장없어."라는 말을 내뱉으려면 '대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말에는 조용한 자신감이 있다. 네가 말한 그 문제, 이미 나도 알고 있지! 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 그건 아주 작은 부분이고, 무시해도 괜찮은 부분이야. 그 정도는 알고 있고, 컨트롤할 수 있고, 여차하면 책임도 지겠다는 말.
숲을 보는 사람과 나무를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나무를 보는 사람 쪽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세다가 이 숲이 무슨 숲이었는지 잊고 만다. 작은 부분에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큰 틀에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수를 한다.
어떤 일에나 작은 암초는 있기 마련. 마주친 작은 암초를 보고 패닉에 빠진 사람 옆에서 차분하게 "괜찮아, 대세에 큰 지장없어."라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든든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대세엔 지장이 없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사람을좋아하게 되고 만다.
그들은 큰 그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때문에 이 정도 디테일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지엽적인 것에 집착해 큰 것을 놓칠 때, 그들은 '대세'만 빠르게 파악하고 큰 문제가 없으면 세부내용은 잊어버린다. "아 몰라 대세에 큰 지장 없어!"를 외치고 나면 마치 합심해서 노를 젓는 배처럼 으라차차 더 빨리 전진할 수 있다.
작은 실수, 작은 결함, 작은 위험요인들을 모두 끌어와 하나하나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때론 묵직하게 멀리 보면서 "괜찮아, 대세에 큰 지장없어!" 라고 말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이건 회사 생활을 통해 배운 것 중에 가장 쓸모있는 자세였다.
회사에서나 쓰이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이 말이 일상에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남의 전화통화 내용을 들은 뒤였다. 입사면접을 보고 온 것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얼핏 전화 내용을 들으니 면접을 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엄마! 아 괜찮아 괜찮아. 걱정 좀 하지마!"
그녀는 자기도 속이 탔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드링킹하고 말했다.
"엄마, 내가 생각해보니까, 스물아홉에 취직하나~ 서른에 취직하나~ 대세에 큰 차이 없어~"
입사시험을 잘 못 본 건 물론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 뭐, 평생 놀겠는가? 취직은 언젠가는 될 것이다. 어차피 평생 일하며 살 인생, 대세에는 큰 차이 없다고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 분의 말투가 어찌나 초탈하면서 유쾌했던지, 통화 내용을 듣는 나도 덩달아 안심(?)하게 되었다. (전화를 받는 어머님도 안심하셨기를!)
어차피 대세에는 지장 없다.
이러나 저러나 대세에는 큰 차이 없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사실 정말로 '대세'에 큰 지장이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대세'가 뭘까?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 일이 그 '대세'에 그렇게 큰 스크래치를 낼 일인가? 내년 이맘때에도 마음이 아플 일인가?
아니.
그렇다면 괜찮아, 대세엔 큰 지장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가자.
이번 주는 유독 일이 많았고 사람에 부대꼈다. 지친 퇴근길에 회사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을 복기하며 걷다가 한숨이 푹푹 나오곤 했다.스스로에게 가만히 속으로 말해주었다.
오늘 할 일을 다 못했네.
- 괜찮아, 그 일 오늘 하나 내일 하나, 대세에 큰 지장없어.
오늘 보고 완전 이상하게 했는데 어떡하지. - 괜찮아, 뜻만 잘 전달되면 되지. 대세에 큰 지장 없어.
오늘 그 사람이 한 말 진짜 짜증나. - 괜찮아, 어쩔 거야, 나 싫어하는 사람 하나쯤은 있는 거지. 대세에 큰 지장 없어.
나에게 "대세엔 지장 없다"는 말은
작은 결점, 또는 작은 실수를 감싸주는 말,
진짜 중요한 것을 보게 하는 말, 그래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날,
누군가가 나에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말이기도 하다.
퇴근 후에는 회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회사에서 배운 이 말만은 자주 쓰고 싶다.
계속계속 듣다 습관이 될 때까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말해주기로 한다.
괜찮아, 대세엔 큰 지장 없어.
* 이 말은 복근에 힘을 뽝! 주고 내가 아는 가장 쿨하고 멋진 사람, 또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인생 좀 아는 멋진 언니에게 빙의해서 말하면효과가 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