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 앞에서는 늘 마음이 한없이 작아진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회사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 맞나? 하고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네,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아니요 이건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일인데요,라고도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 그럼, 하고 싶은 일을 하루에 얼마나 하고 살고 있나요?
이 질문은 마치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처럼 낯설다. 하루를 되돌아본다. 음… 제 하루의 대부분은 해야 하는 일, 아니면 해야 할 것 같은 일인데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십 프로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혼자 충격을 받았다. 노트에 적어 보았다.
1. 해야 하는 일.
2. 해야 할 것 같은 일.
3. 하고 싶은 일.
내 하루는 대부분 1과 2로 빼곡했고, 1과 2를 가장 먼저 하고 3을 습관적으로 미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만 해도,
해야 하는 일- 출근을 했다. 오늘까지 보내야 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가야 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해야 할 것 같은 일 – 영어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출근길에 영어 콘텐츠를 들었다. 혼자 쉬고 싶었지만 오늘 팀에 사람이 없어서 팀 점심을 함께 먹었다. 내일 보고를 앞두고 부서 전체가 야근을 하기에 나도 어영부영 눈치 야근을 했다. 퇴근길에는 확 나가버리고 싶은 단톡방에 실시간으로 리액션해주다 보니 안 그래도 피곤한 눈이 더 아팠다.
하고 싶은 일(그런데 하지 못한 일)- 출근길에 보고 싶었던 브이앱을 못 봤다. 점심시간에 혼자 쉬면서 산책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 퇴근 후 눈이 아파서 쓰고 싶었던 글을 쓰지 못했다. 친구한테 연락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다음으로 미뤘다.
그렇다. 나는 해야 할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고리타분한 성향을 갖고 있다. 그다음으로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만들어낸다. ‘해야 할 것 같은 일’은 괜한 책임감, 칭찬받고 싶은 마음, 욕먹기 싫은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다. 이래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이러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자기 검열 속에서 ‘해야 할 것 같은 일’은 끝없이 불어난다.
여기에 계속 시간과 마음을 쓰다 보면 심지어 내가 이걸 진짜 원하는 게 아닌지 착각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도 영어공부가 하고 싶었어… 나도 팀 점심이 먹고 싶긴 했어… 사실 야근하는 게 그렇게 싫은 것만은 아니야...)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것 같은 일을 다 하고 마지막으로 남는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렇게 점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은 줄어만 간다. '하고 싶은 일'은 내일로, 주말로, 휴가 때로 미뤄지게 된다.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이것만 하면, 오늘만 야근하면, 이번 주만 참으면... 이라는 말들로 유예되어 온 나의 설렘과 기쁨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그동안 이렇게 믿었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것만 하면 편히 쉴 수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맘 편히 쉴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 같아서,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주어진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일 하나가 끝나면 일을 더 받는다!)
해야 할 것 같은 일의 목록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의 기대, 상사의 피드백, 남들의 오지랖을 백 프로 만족시키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남을 기쁘게 하는 일과 나를 기쁘게 하는 일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지분 조절을 하지 않으면, 영영 놀 수가 없다.
정말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의 비중을 키워가는 일. 나는 이 분야에서 쪼랩이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인지 하도 헷갈려서 요새는 내 마음 탐지기 질문까지 만들어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 ‘해야 할 것 같은 일’에 해당한다. 이건 내 욕망이 아니다.
“이상하게 이게 하고 싶네? 희한하게 이게 땡기네?” → 딩동댕, 이게 내 욕망이다.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쪼랩인 나는 요즘 딴청 피우기를 연습하고 있다.
‘딴짓’과 ‘딴청’의 사전적 의미는 둘 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그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나 행동’이다. 하지만 둘의 어감은 조금 다르다.
‘딴짓’은 해야 하는 일은 옆에 치워두고 하고 싶은 일(대개는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일이다. 학교 생활에 비유하자면 수업 시간에 몰래 만화책을 본다던가, 자율학습 시간에 뒷자리에서 고데기로 머리를 만다던가, 아님 아예 땡땡이를 치는 게 딴짓이다.
고등학생 때 나는 이렇게 딴짓을 하는 무리들을 내심 동경하곤 했다. 나는 선생님께 혼나는 게 무서워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떻게든 자리를 지키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딴청을 피웠다. ‘딴청’은 멀쩡하게 할 일을 하는 척하되 속으론 내 관심사에 집중하는 일이다. 수업은 듣지만 머릿속에선 어제 읽은 만화책을 생각하고, 문제집은 풀지만 속으론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부르고, 땡땡이는 치지 않지만 마음속에선 주말에 뭐할지 몇 번씩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딴짓보다 덜 적극적이고 그래서 힘이 덜 들어간다. 딴짓을 못하는 사람도 딴청은 피울 수 있다.
딴청- 이라고 말할 때의 그 슬며시 밀어내는 어감이 좋다.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내 자유공간을 확보하는 일.
명상은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이라는 말이 있다.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 잠시 호흡을 고르며 나의 반응을 결정할 수 있는 시간. 딴청은 기대와 반응 사이의 공간 같다.
'네가 나에게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들어주지 않을 자유가 있지!'
우리는 딴청을 피움으로써 해야 할 일 말고 나의 감정과 욕구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벌어 둔다.
‘음… 하기 싫은데… 꼭 해야 하나? 안 할 방법은 없나? 나는 다른 게 하고 싶은데…’
딴청은 해야 할 일에 바로 코를 박고 착수하는 게 아니라, 잠시 멈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휘파람을 불어 보는 자세다. 그런 일 분, 그런 오 분, 그런 십 분이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고 말랑말랑한 인간으로 만든다.
딴청은 일견 편해 보이지만 실은 불편함을 견디는 자세이기도 하다. 사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으면 마음이 어느 정도는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줘...) 회사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하기 싫어서 계속 미루고 있을 때, 글쓰기 마감을 앞두고 <부부의 세계> 재방송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사실 몹시 불편하다.
불편함을 견디면서 딴청을 피운다. 그때마다 나는 침대 매트릭스 밑에 완두콩 한 알을 넣어 놓았더니 불편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던 동화 속 공주를 떠올린다. 공주여, 잠을 자라! 등이 배겨도 잘 수 있어야 한다! 이 불편함을 못 참으면 해야 할 일만 주구장창 하다가 죽는다고!
나는 아직 딴짓은 잘 못하지만 딴청은 가끔 피운다. 마치 남몰래 저중량 피트니스를 하듯이, 뒤통수가 따가워도 모른 척 나는 내 갈 길을 가는 힘, 남의 볼맨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힘을 조금씩 늘려간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근력을 갖게 되기를 바라면서.
+ 이 글은 절대 부장님이 시킨 일을 하기 싫어서 딴청을 피우다 쓴 글이 아님을 밝힌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