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노스에 발 묶인 날

by 몽돌

산티아고 순례길 사흘째 날은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5km를 걷는 날이다. 대다수의 순례자들이 평균 하루 25km씩은 걷기도 하고, 푸엔테 라 레이나 이전에는 큰 마을이 없기 때문에 순례길 사무국에서 권장하는 일정이기도 하다.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기 위해선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보다 지친 시력이 개안할 정도로 푸르른 보리밭을 한참 걷는다. 바람이 보리밭의 머릿결을 넘기는 것을 본다. 파도치듯 밀려가는 보리밭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본다. 커다란 구름이 보리밭에 제 몸만 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가 구름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우리는 용서의 언덕 정상에 오른다.


한국에 두고 온 기억 중에 누구를 용서해야 할까. 잠시 감상에 잠길 새도 없이 20대 한국인 순례자 무리를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다. 오랜만에 실컷 한국어를 쓰면서 서로서로 온갖 각도의 인증샷을 찍어준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인스타용 사진을 건지고 난 뒤, 다 같이 다음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헤어진다.



언덕을 내려갈 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용서의 언덕은 올라갈 때는 완만했지만 내려갈 때는 아주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평생 버스만 타고 다녔던 무릎은 이미 며칠간의 여정으로 지쳐 있는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급경사길이 계속되자 여기저기서 악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나는 오른쪽 무릎을, K는 왼쪽 무릎을 절기 시작한다. 무릎 밴딩을 하고 파스를 바르지만 차도가 없다.


기어가다시피 해서 용서의 언덕을 내려온 K와 무조건 처음 보이는 알베르게에서 묵자고 결의한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을 사 마시면서 그냥 여기서 숙박까지 해 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찰나, A언니가 카페로 들어온다. 발이 무지하게 빨라 하루에 40km씩은 걷는 것 같은 A언니는 우리가 여기서 묵겠다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어머, 벌써 여기서 쉬려는 거예요? 여기서? 아니야, 좀 더 갈 수 있어. 좀만 더 힘을 내 봐요.


언니는 여기서 점심만 먹고,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도 몇 키로 더 가야 있는 마을에 묵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A언니를 보자 갑자기 오기가 생긴다. 그래, 더 가 보자. 조금만 더 가 보자.


그리고 우리는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우리의 결정을 후회한다. 누가 뭐래도 아까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오바노스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km는 더 가야 하는데 내 무릎은 절뚝이다 못해 너덜거릴 지경이다. K는 우린 할 만큼 했어, 라는 얼굴로 쳐다본다. 우리는 오바노스에서 묵기로 한다.





오바노스의 하나뿐인 알베르게는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건물로, 천년 묵은 베드버그가 나올 것처럼 생겼다. 12시도 되지 않아 알베르게에 입성한 우리는 아직 사분의 일도 채워지지 않은 신발장에 신발을 넣으며 패잔병 같은 기분을 느낀다. 중세인들이 살았을 것 같은 반질반질한 돌바닥, 돌벽으로 된 숙소는 가만히 있어도 냉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K가 콘센트가 네 개밖에 없다고 비명을 지른다. 침대가 40개가 넘는데 콘센트는 네 개라니! 휴대폰 없이 못 사는 우리는 패닉한다. 누가 오기 전에 바로 폰을 충전기에 꼽는다.


하나밖에 없는 공용욕실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무릎 통증이 좀 가시는 것 같다. 연이어 순례자 숙박객들이 들어오는데 전부 백발이다. 용서의 언덕에서 장렬하게 무릎을 혹사시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에구구구,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눕는다. 파스 냄새와 베드버그를 물리치는 살충제 냄새만 날 뿐, 이 숙소에선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베드버그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목재 소재의 삐걱거리는 이층 침대에 올라가 눕는다. 컴컴한 천장을 바라보자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든다. 한 마리의 베드버그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침낭을 꽁꽁 잠그고 눈만 보이게 누워 있던 나에게 K가 말을 건다.


언니, 우리 심심한데 마을 구경이라도 하자.





슬리퍼를 신고 마을 구경을 나간다. 마을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중세 시대에 지어진 교회와 중세 이전에 지어진 것 같은 돌로 된 광장. 이대로 중세 드라마를 찍어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오래된 마을이다. 심지어 날씨마저 흐린 가운데, 우리는 조용하고 적요한 마을을 걷는다.


점심을 먹기 위해 트립어드바이저를 켜 보지만 이 마을 식당에는 아무 리뷰가 없다. 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식당에 들어간다. 식당에는 축구 경기가 무료하게 틀어져 있고 청소를 하던 주인장이 나와 자리를 안내한다. 스페인어 메뉴판을 구글 번역기를 돌려 신중하게 해석한 후 나는 생선 요리를, K는 돈가스 요리를 시킨다. 물고기 요리는 도무지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맛이 나서 우리는 구글 번역기의 성능을 의심하게 된다.


음식점을 나와 근처의 카페로 향한다. 작고 아담한 카페의 문을 열고 우리는 깜짝 놀란다. 이곳에 마을의 모든 사람이 모여 있는 것 같다. 바깥은 그렇게 조용했는데 카페는 터져나갈 것 같은 활기로 가득하다. 어르신들은 바 근처에 삼삼오오 서서 작은 유리잔에 담긴 맥주를 마신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여성이 타파스 하나에 맥주 한 잔을 맛나게 마신다.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서서 누군가와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는 바 한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따뜻한 핫초코를 시켰다. 달달한 핫초코를 마시며 카페 안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다들 무슨 말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마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이제야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처럼 웃고 떠든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아는 것 같다. 훤칠한 키의 청년들이 들어오자 이미 도착해 있던 친구들이 뭐하다가 이제 왔냐며 반긴다. 옆에서 할아버지들이 너네는 좀 작작 놀아라, 하듯이 핀잔을 주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다운 심드렁함으로 네네, 하며 노인의 훈계를 물리친다.


우리는 이 카페가 너무 재미있어 핫초코를 야금야금 아껴 마신다. 더 이상 아껴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이 바닥나자 카페를 나온다. 카페의 문을 열고 나오며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카페 밖 공터에서 가수가 단상 위에 올라가 노래를 하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을 축제날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둘씩 손을 잡고 몸을 빙그레 돌려가며 춤을 춘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젊은 아가씨도, 심드렁한 청년도, 어린이도 춤을 춘다. 마치 오랫동안 감옥에 감금되었다 나와 이제야 몸을 쓰는 걸 허락받은 사람들처럼, 다들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춘다.


뜻밖의 광경에 우리는 계속 웃음이 나온다. 내내 오바노스는 죽은 마을이라고 투덜거렸는데 이런 축제의 현장이라니! 휴대폰을 들어 이 모든 것들을 녹화하려다 내려놓는다. 눈으로만 이 모습들을 담아두기로 한다. 눈이 카메라라면 깜빡, 깜빡 하고 눈을 깜빡여 이 모든 것을 촬영해 놓고 싶다. 보고 있는 사람도 같이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광경이지만 무릎을 저는 가여운 순례자들은 어깨만 들썩 들썩하며 흥겨움에 동참한다.





다시 돌아온 숙소에서 우리는 이제 꽉 차 있는 신발장을 본다.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여기서 묵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오바노스 알베르게의 유일한 젊은이이지 한국인인 우리는 소등 시간이 되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옛 수도원에서 신부들이 식사를 했을 것 같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다. 슈퍼에서 대용량으로 묶어 파는 빵이지만 잼과 버터에 발라 먹으니 맛있다. 알베르게에서 봉사하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한 커피를 쪼르르 따라 준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다시 걸을 힘이 난다.


어제 던지듯이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다시 길을 나선다. 약 삼십 분을 걸어 원래 도착하려고 했던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한다. 어제의 간절한 목적지였던 푸엔테 라 레이나는 안중에도 없이, 우리는 어제 만약 여기까지 왔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오바노스의 풍경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한다. 정말, 신기한 마을이었어. 이 마을은 나중에도 계속 기억날 것 같아. 우연히 불시착한 곳에서 만났던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우리는 계속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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