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대만 교환학생을 마치고 섬을 한 바퀴 도는 환다오 여행을 일주일 동안 할 때였다. 말 못하는 외국인이 타기엔 그나마 버스보다 기차가 나아서 그 여행에서는 내내 기차를 탔다. 왜 어느 나라를 가도 기차에선 기차 냄새가 나는 걸까? 그때를 생각하면 철컹철컹 달리던 기차와 그 안에서 풍기던 중국식 도시락 냄새와 두이아- 두이아- (맞아, 맞아) 하며 옆 친구의 말에 맞장구쳐주던 승객들이 생각난다.
며칠 간의 여행 끝에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에 내렸을 때, 나는 여행 첫 며칠 간의 긴장이 녹고 '입이 풀린' 상태였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땐 반년 배운 중국어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70%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모든 게 걱정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씩씩하게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부킹닷컴에서 찾은 하루에 만 오천 원 하는 최저가 숙소였다.
다행히 한자 간판이 빼곡한 시장 한가운데에 유일하게 영어로 적힌 간판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어두컴컴하고 좁디좁은 목제 계단을 올라가 게스트하우스 로비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숨을 헉 하고 참았다. 오래된 건물의 낡은 느낌을 감추고 히피스러운 느낌을 더하기 위해 벽에 파란색 페인트를 끼얹었지만, 특유의 궁색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로비 중앙의 소파와 노란 전등은 일견 코지해 보였지만 십 분만 앉아있어도 온 몸이 가려울 것 같았다. 나는 잠시 환불을 고민했지만 중국어로 환불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틀 밤 만이고, 잠만 자고 나갈 건데 뭐.
목이 길고 나른한 인상의 주인은 카드를 받으며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단번에 "안녕하세요"를 했다. 자기도 몇 년 전에 고려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며, 한국 친구들이 "쏘쥬"를 자기에게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참 술을 좋아하죠. 한국어 정말 잘하시네요. 이런 대화들을 중국어로 나누며 방으로 향했다.
목재 2층 침대가 다닥다닥 세 개 붙어있는 도미토리 6인실. 방의 벽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가장 예술가적인 색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퀴퀴함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의 얼룩을 안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어둡게 한 것 같은 노란 조명. 나중에 밤에 돌아와 일기라도 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주인은 이 방은 오늘 혼자 쓰면 된다고, 편히 묵다 가라고 말해 주었다. 왜 하필 화장실과 가장 먼 방을 주는가,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말을 속으로 삼켰다. 물을 좀 적게 먹으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귀신 나올 것 같은 방을 떠나 얼른 가오슝 구경을 하러 나갔다. 가오슝은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해안 도시로, 아이허라는 커다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야간조명과 노을이 유명하다 했다. 아이허를 구경하고 근처의 야시장에서 밥을 사 먹기로 했다.
해가 진 아이허(愛河)는 사랑의 강이라는 이름답게 빨간 하트, 하얀 하트, 온갖 색색의 조명으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널찍하고 조용했다. 그 조용한 강변에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들릴 것 같은 대만 트로트가 짠짠짜라 울려 퍼져 쓸쓸한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동아시아 공통의 트로트 음악은 내가 떠나왔지만 그렇게 멀리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중국어가 적힌 표를 소중히 들고 페리에 올랐다. 강바람에서 강물에서 올라오는 짭짤한 바다 향을 느꼈다. 원색의 조명들로 가득한 아이허의 야경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같이 오른 승객들의 중국어, 대만어를 들으며 이 페리에 외국인은 나밖에 없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배가 텅 빈 것 같은 허기가 느껴졌다.
페리에서 내려 지역의 명물이라는 리우허 야시장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 시장은 해산물에 특화된 시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해산물 요리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서 걷는 사람의 뒷머리에 코를 박고 걸으며 곁눈질로 시장 구경을 했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뭔가를 굽고 볶는 냄새가 가득했다. 해물과 조개를 무게를 달아 파는 좌판 옆 테이블에 여러 사람들이 국수를 먹고 있었다. 어떻게 주문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운 아저씨가 나에게 뭐라 뭐라 대만어로 말을 걸었다. 그의 대만어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대만에 온 이후 가장 많이 쓴 두 문장을 내뱉었다.
워쓰한궈런. 팅부동. (저는 한국인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는 물었다.
그럼 중국어는 할 수 있니?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제야 중국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만에서 공부 중이니? 여기 가오슝은 왜 왔어? 아니, 먼저 밥을 먹어야지. 이 집은 해물 국수를 먹어야 해. 새우 먹을 수 있니? 조개는?
그는 카운터에 가 빠른 말투로 주문을 했고, 주인은 금방 뜨끈뜨근한 김이 올라오는 뽀얀 국물의 해물 국수를
한 그릇 가져왔다. 작은 조개와 새우와 생선살이 가득한 국물이 곰국처럼 뽀얀 가운데 보들보들한 면이 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샌드위치만 먹던 위에 뜨끈한 소금물이 들어가자 눈이 번쩍 떠지는 듯했다.
장 아저씨는 홍콩 영화배우처럼 눈코가 큼직하고 광대가 두툼한 사람이었다. 박처럼 둥근 배를 퉁퉁 두드리며, 그는 자기가 시장 상인들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시장 근처에서 아내와 딸, 아들과 같이 산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대만을 여행하고 있는 걸 대견해했다. 내가 국수를 다 비우자 그는 나를 데리고 시장의 가게를 하나하나 들르며 상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게 도와주었다.
여기 한국에서 온 용감한 아가씨가 있어! 같이 사진 좀 찍게 비켜봐!
희한하게도 그와 함께 다니면 홍해가 갈라지듯 인파 속에서도 길이 열리고 무뚝뚝해 보이던 시장 상인들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며칠간의 여행 동안 찍은 사진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었다. 시장 입구에서 한 장, 처음 보는 거대한 생선 옆에서 한 장, 가오슝에서만 나는 특이한 모양의 과일을 들고 또 한 장.
장 아저씨는 아이허 야경보다 더 멋진 볼거리가 있다며, 가오슝에 와서 그걸 보지 않으면 가오슝에 온 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시장 입구에 세운 본인의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가오슝 시내를 가로질러 달렸다. 나는 내 머리보다 훨씬 큰 헬멧을 쓴 채 그의 회색 스웨터 옆구리를 잡고 시내를 달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니 아까 걸어 이동한 많은 장소들이 훨씬 화려하고 빛나게 보였다. 시원한 강바람이 오토바이를 탄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오토바이 무리 속 일부가 되어 신호를 기다리며, 나는 처음으로 이 도시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장 아저씨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가오슝이 얼마나 강하고 멋진 도시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이베이 샌님들은 모르는 가오슝의 매력에 대해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70프로만 알아들었지만 두이아- 두이아-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한참을 시내를 구경하고 나서, 그는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나를 내려다 주었다. 게스트하우스 근처 시장은 어둑하니 문을 닫고 노란 조명 몇 개가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아까의 그 영어 간판을 확인하고 올라가려 할 때, 그는 갑자기 내 가까이 다가와 입술을 부볐고 나는 얼어붙었다.
너는 정말 귀여워. 나는 너에게 가오슝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를 어떻게 떼어 내고 숙소의 내 방까지 올라왔는지, 그리고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주인에게 어떻게 안되는 중국어로 환불 요청을 했는지, 타이베이행 기차표는 어떻게 샀는지. 다만 기억나는 건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기차가 좌석을 구하지 못해 입석이었던 것, 여러 사람들의 캐리어로 가득한 짐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 당시의 애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국제문자를 보내자 그가 보낸 답장. "그러게 낯선 남자 오토바이는 왜 탔어. 조심했었어야지."
타이베이로 돌아오고 며칠 뒤, 나는 예정되었던 대로 반년의 교환학생 학기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졸업을 미루고 미룬 끝에 취업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번 돈으로 가끔 해외여행을 갔다. 더이상 6인실 도미토리에 묵지 않고, 밤거리가 어두운 숙소에서도 묵지 않는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앞에 앉아있던 나에게 티모시 살라메를 닮은 외국인이 말을 걸었을 때에도, 폴란드에서 쇼팽 콘서트를 기다리던 나에게 배낭여행객이 쇼팽을 좋아하냐고 말을 걸었을 때에도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
내가 지금 어딜 가야 해서, 미안.
돈 들여 간 여행지에서도 계획된 곳을 계획된 시간에 가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오는 나를 보며 나는 내가 싫을 때가 많았다. 왜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영감을 얻지 못하나. 어째서 일상이 아닌 여행지에서도 나는 내 틀에서 나올 수 없는가. 왜 더 무모하고 용감해지질 못하나. 나는 여행을 와서도 너무 나 같기만 한 나를 탓했다.
십 년 전 가오슝 여행에 장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최근에야 다시 떠올린 기억이다. 그 경험이 여행 전체를 망치게 하기 싫다는 마음에서였을까? 신기하게도 나는 대만 여행 기억 속에서 장 아저씨를 가장 먼저 지웠다. 가오슝 여행에서 내가 남긴 기억은 오직 트로트가 울려 퍼지는 아이허 강, 뜨겁고 짰던 국수,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바라본 밤거리뿐이었다. 하지만 잊힌 줄 알았던 그 어두운 뒷골목의 잔상 때문에 나는 전보다 망설임 많은 여행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지의 모험은 항상 위험과 함께 온다. 여행자로서 나는 모험을 택하고 누가 다가오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팽팽 돌려 위험의 정도를 빠르게 계산한 뒤다. 상대의 제안에 겉으론 쿨하게 '예스'라 말하면서도 속으론 여차하면 도망갈 핑곗거리를 만들어 둔다. 긴장감을 놓지 않은 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같이 새로운 장소에 간다. 그럼에도 만약 정말 위험이 찾아온다면 나는 세상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게 왜 그랬어. 조심했었어야지.'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장 아저씨가 사 주는 국수를 거절할 수 있을까? 만나기로 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세련되게 거절했다면 그날 내 여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 아저씨에게 분노함이 마땅하지만, 나는 그날 오토바이 행렬의 일부가 되어 바라본 가오슝의 반짝이는 밤거리를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모험에 대한 매혹과 경험이 준 신중함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줄다리기를 한다. 기약할 수 없는 다음번 여행에서 나는 과연 어떤 여행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