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환학생을 대만에서 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느리고 평화로운 날들이었어. 늘 덥고 습했기 때문에 땀이 덜 나려면 아주 천천히 걸어야 했거든. 중국어를 잘 못해서 더듬더듬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친절하게 끝까지 들어주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
대만은 너도 알겠지만 작은 섬이라서, 대학생들은 졸업 전에 한 번은 환다오(環島) 여행을 하곤 해. 말 그대로 대만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일주 여행이지. 기차를 타고, 스쿠터를 타고, 또는 자전거를 타고, 어떤 사람은 히치하이킹을 해서 그렇게 섬을 한 바퀴 도는 거야.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환다오 여행을 했어.
혼자서 씩씩하게 섬을 돌아보겠다 결심했지만 타이베이를 벗어나니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정말 외롭더라구. 낯선 나라의 낯선 소도시, 사람이 붐비는 떠들썩한 야시장에서 혼자 샤오츠(간식)를 사서 빈 테이블을 찾아 앉을 때. 혹시 누가 합석을 해 오면 필사적으로 그쪽은 보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인 음식에만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할 때. 옆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면서도 대개는 한 마디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 혼자 하는 여행은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척 외로웠어.
그러다 대만 동북부의 화롄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였어. 화롄의 호스텔에는 나처럼 환다오 여행을 하는 서양인과 대만인 대학생들이 많았어. 나는 시계 방향의 환다오 여행을 막 시작했고, 한 대만인 커플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여행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지. 그 커플은 어찌나 다정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샘이 나서 죽을 것 같았어. 나는 쓸쓸하게 육인실 도미토리로 향하는데, 걔네는 글쎄 손을 꼭 잡고 속삭거리면서 이층의 커플룸으로 가지 뭐야.
그날 우리는 각자 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해서 나눠 먹었어. 나는 마음속의 부러움을 조용히 누른 채, 그 커플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 스몰 토크답게 여행지 이야기로 시작했어. 너희는 지금까지 환다오 여행 중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니? 그러자 남자와 여자가 입을 모아 말했어. 타이마리! 타이마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너는 꼭 타이마리에 가 봐야 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어. 여자아이의 낭랑한 성조 때문일까? 타이 마,리 라는 지명은 마치 빠, 히(Paris)처럼 우아하게 들렸어. 남자아이가 나에게 타이마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참에, 여자아이 불에 올려둔 음식이 끓어 넘쳐 이야기가 끊기고 말았어.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더 물어보고 싶지 않았어. 타이마리가 어디야? 어떻게 타이마리에 갈 수 있니? 타이마리에선 무엇을 보고 뭘 먹어야 하니? 같은 질문들 말이야. 그냥 어서 더 큰 도시로 가서, 싱글룸이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혼자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고 싶었어.
화롄에서 출발해 대만의 동부 해안을 도는, 우리로 치면 강원도 바다열차 같은 기차가 있어. 다음날 나는 그 기차를 타고 대만 남부로 향했어. 내 오른편에는 꼭 우리나라 동해바다 같은 짙고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넘실대고 있었어.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어. 매일이 모험이던 교환학생 시절이 끝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내 바로 앞자리에 앉은 시끄러운 고등학생 무리들이 너무나 거슬렸어. 자기네들끼리 중국어와 대만어를 섞어 이야기를 하는데, 아니 그 나이의 여고생과 남고생은 뭐 그렇게 서로 깔깔거릴 일이 많대니.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너무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거야. 나는 그냥 이어폰을 낀 채로 눈을 꼭 감았어.
그렇게 한참을 가다 조용해져서 눈을 떠 보니, 시끄러운 학생 무리가 내렸더라. 기차는 마침 잠시 정차해 있었어.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 햇살이 비쳐 반짝반짝거렸어. 해안가 마을의 흰색, 분홍색, 하늘색 지붕이 깔끔하고 단정했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역 표지판을 보니, 한자로 태마리(太麻里)였어.
이곳이 그 아름답다던 타이마리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유심히 쳐다봤어. 작은 해안가 마을은 왠지 내가 이제껏 봤던 마을과는 조금 달라 보였어. 그 커플의 말이 다시 생각났어. 타이마리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너는 꼭 타이마리에 가 봐야 해.
원래의 목적지까지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 했지만, 순간 여기서 그냥 내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번 그냥 저 열린 기차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릴까 생각했어. 안 될 건 없잖아? 여행 속의 여행, 모험 속의 모험.
그 순간 생각난 건 이미 예약해 놓은 숙소였어. 게스트하우스 6인실의 침대 하나, 하루에 이만 원도 안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이미 찾아놓은 일주일치 여행지. 일정이 바뀔 때의 번거로움. 정보가 없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다시 찾아야 하는 교통편.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어. 그리고 아마 다시 오지 못할 타이마리 표지판을 한번, 바다와 마을을 한번 더 쳐다봤지. 바로 그 순간 기차 문이 닫히고 출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그 상태에서 몇 분은 더 정차했던 것 같아. 나는 초조해졌어. 지금 어쩌면 아주 멋진 곳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누가 소매치기해갈까 싶어 앞으로 맨 크로스백을 꼭 쥔 채로, 반짝이는 타이마리의 바다를 바라보았어. 내리고 싶은 마음과 내려야 할 것 같은 마음, 내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내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 사이에서 시간이 흘렀어.
마침내 문이 닫혔고, 기차는 원래의 목적지로 유유히 나아갔어. 나는 문이 닫힌 것에 내심 안도하면서 다시 나의 여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
그게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야.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나는 타이마리를 떠올려.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아마도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세상에 수많은 좋은 곳이 있는데, 고작 이름 한 번 들어본 마을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다시 탈 수 있을까. 그리고 막상 가더라도 뭐 별 게 있겠어. 그냥 조용하고 깨끗한 바닷가 마을이겠지.
그러니 그때 타이마리에 내렸더라도 달라진 건 없을 거라고,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을 해.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 그 기차 안에 있는 나를 종종 떠올려. 가방을 꼭 쥔 채로 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던 나. 반짝이는 바다와 아름다운 지붕의 마을. 마치 마법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 같던 타이 마, 리라는 지명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