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쓰려고 나를 쓴다

자기 표현과 자기 소모

by 몽돌

세 권의 책을 낸 에세이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한참 회사 생활이 힘들 때여서, 자기 콘텐츠를 갖고 일을 할 수 있는 작가란 직업이 너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저는 일과 저를 철저히 분리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어요. 예를 들면 스튜어디스 같은? 스튜어디스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일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저는 계속 저를 팔게 되거든요. 예를 들어 실연을 겪으면, 슬퍼서 우는 도중에도 메모장을 찾게 되는 거죠. 언젠가 쓸 수 있게 지금 이 감정을 기록해 놔야 해, 하면서요.


그때는 잘 이해가지 않던 그의 말이, 책을 한 권 낸 초보 작가가 되고 나서 와 닿기 시작했다. 즐거운 취미가 아니라 내보이고 팔리는 글을 쓰기 시작한 자, 그런 세계를 알게 된 자는 그 전과는 다른 태도로 글을 쓰게 된다.


가장 달라진 것은 독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슬펐던 때는 새벽에 깨어 모닝 페이지를 쓰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남에게 보여줄 만한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을 검열 없이 쏟아내려 했는데 어느새 기승전결과 인용문까지 갖춘 한 편의 팔릴 만한 글을 쓰고 있었다. 아니 새벽 다섯 시 반에! 독자를 의식하면서! (그리고 그 글은 다듬어서 브런치에 발행했다...)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다. 그러려면 글이 많이 팔려야 할 것 같다. 많이 팔리는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회사에서 내 담당 제품의 유니크 세일즈 포인트를 찾듯이, 나라는 브랜드의 유니크 세일즈 포인트를 찾게 된다. 사람들이 공감하고 열광할 만한 지점을 찾아 나를 검색한다. 오래전 내 일기장과 모닝 페이지 묶음을 펼쳐두고 여기서 뭐 더 '써먹을' 것 없나 호시탐탐 페이지를 넘긴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도 아주 반사회적이지만 않다면 충분히 재가공해서 예쁜 에세이 한 편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 나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나를 소모한다.

나에 대해 쓰기 위해 나를 쓴다.


글을 쓸 때마다 내 마음에 도르래를 내려 물을 긷는다. 가장 깊은 곳을 길어다 남이 먹을 수 있게 차려 내놓는다. 사람들이 꿀꺽꿀꺽 그 물을 마시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내 우물은 다시 차오르는 걸까, 아님 말라가는 걸까?


누구에게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속의 뻥 뚫린 구멍이 있다. 그 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채우는 게 글쓰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쓰면 쓸수록 그 텅 빈자리를 더 또렷이 인식하게 된다. 마음속 결핍과 슬픔과 물음표들에 더 시선을 주고 관찰하게 된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론 항상 낚싯대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찌가 조금만 흔들려도 언제든지 낚싯대를 잡아당길 수 있도록, 민감한 레이더를 세우고 하루를 산다. 때론 충만하고, 때론 피곤하다.


그냥 좀 맹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다면 글을 쓰지 않을 텐데. 글을 안 써도 된다면 그냥 좀 맹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 텐데.


사람마다 글쓰기 동력이 다르겠지만, 나는 무사 무탈 행복한 하루를 보내면 글이 안 써지는 편이다. 초등학생 일기장마냥 "오늘도 참 재미있었다. 내일도 재밌게 놀아야지!"같은 글밖에 나오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한 달의 기간 동안 정말 그런 일기밖에 쓰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나 평온했다. 곱씹고 불안해할 일도 없었고, 더 바라는 것도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평생 그런 상태로 살 수 있다면 글 따위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쓴다. 읽어줄 이 없이도 그냥 혼자 담아놓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쓴다. 그렇게 치면 모든 작가와 예술가는 사실은 어느 정도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업과 병행하며 여러 권의 에세이를 부지런히 펴낸 작가 K는 이제 더 이상 직접 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고통스러운 생산자에서 행복한 소비자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나는 '고통스러운 생산자'라는 말에 오백 번 줄을 긋고 싶었다. 소비자일 때는 남의 유려한 글을 읽는 게 순수한 기쁨이지만, 생산자가 되면 이젠 마냥 기쁨만은 아니게 된다. 전엔 너무나 좋아하던 책 팟캐스트였는데 이젠 들으면서 출판시장을 분석하게 된다.


- 저 사람 두 번째 책 냈구나. 하루 만에 재쇄 들어갔다니 부럽다.

- 요새는 저런 주제의 글이 트렌드인가 보다. 나도 저런 쪽으로 써볼까? 지금 이 주제는 너무 구식인가?

-부럽다, 저 작가는 진짜 존재 자체가 인스타그래머블 하구나. 나도 좀 더 나를 드러내야 할까?


이런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마냥 즐거웠던 콘텐츠 소비자로서의 생활, 아무도 안 읽어줘도 그냥 훌훌 썼던 창작자로서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아니 이렇게 중쇄도 못 찍고 말 책이었다면 나를 이렇게 바꿔놓진 말았어야 할 거 아니요! 하고 속으로 절규한다. 하지만 누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잖아, 이제 그만 낚싯대 치워! 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순순히 주섬주섬 낚싯대를 챙겨 떠날 수 있을까?


오늘도 백지 앞에서 도르래질을 계속하는 나를 바라본다. 우물 속에는 아직 꺼내어 놓지 못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마도 당분간은 물을 긷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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