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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Dec 13. 2017

그래서 휴직하고 뭐하니 3

요리를 합니다


휴직하고 집밥 해 먹는 날들


휴직을 하면서 마음먹은 것 중의 하나는 혼자서도 밥을 잘 챙겨 먹겠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점점 술과 커피, 단 음식과 짜고 매운 음식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낮에는 커피와 과자, 빵류로 스트레스를 잊고, 밤에는 술과 자극적인 음식으로 피로를 풀었다. 문제는 내가 선천적으로 소화기가 약한 편이었다는 데 있다. 안 좋은 음식을 많이 먹거나, 한 번에 급하게 먹거나, 밤늦게 먹고 바로 자면 꼭 위와 식도에 탈이 나곤 했다. 항상 카베진과 양배추즙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먹는 것만이 꽉 막힌 일상에서 유일한 일탈이었기 때문에 이 악순환을 멈출 수 없었다. 휴직하는 동안은 그동안 혹사당한 내 몸을 잘 챙겨주고 싶었다.


양배추즙 없이 못 사는 위염 환자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백수는 저녁을 제외하고 아침, 점심은 주로 혼밥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백수의 기쁨에 겨워 오늘은 연남동, 내일은 상수동, 모레는 익선동에서 ‘평일 런치’(회사원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름!)를 먹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올해 들어 오랫동안 백수였던 친구들이 줄줄이 취직하는 바람에 평일에 놀 사람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낯선 거리를 헤매는 용감한 혼밥러가 되는 것은 처음엔 즐거웠지만 그것도 쉽게 질리고 말았다. 당분간 돈 들어올 일이 없는 통장 사정도 고려해야 했다. 여행과 학습에서 돈을 아낄 수 없다면 식비라도 줄여야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외식보다 집밥을 많이 해 먹게 되었다. ‘매일 집밥 해 먹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출근 대신 요리 수업을


처음에는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듣지 못했던 요리 클래스들을 신청해 들었다. 처음에는 주로 자연식, 채식요리를 배웠다. 나는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읽은 뒤부터 고기(소, 돼지, 닭)를 먹지 않는 소위 ‘페스코 베지테리언’(생선, 계란, 유제품까지 먹는 채식주의자) 생활을 10년째 해 오고 있다. 고백하지만 10년 동안 항상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던 것은 아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회식이나 약속이 많아 고기를 완전히 피하기가 어려웠고, 건강한 채식을 하기도 불가능했다. 쉬는 동안 내 한정된 채식 요리의 레퍼토리를 넓히고 싶었다.


가장 먼저 들었던 강좌는 비건 베이킹으로 유명한 스윗솔키친의 비건 케이크 만들기 수업이었다. 버터, 계란, 심지어 밀가루도 쓰지 않고(귀리 등 통곡물가루를 사용했다) 디저트를 만들 수 있다니! 고소하고 두부 크림 위에 봄의 제철 딸기를 듬뿍 얹은 딸기 타르트 케이크를 들고 귀가하는 길, 거의 두부 한 모를 넣은 케이크는 몹시 묵직했지만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밤에 퍼 먹어도 죄책감이 덜할 것 같은, 자극적이지 않고 속이 편한 타르트였다.

달콤한 딸기와 고소한 두부크림의 비건딸기타르트


첫 베이킹 수업을 통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는 베이킹형 인간은 아니구나!’는 깨달음이었다. 베이킹의 생명은 정확한 계량과 레시피 준수였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비누 만들기 수업을 듣다가 스트레스가 더 쌓인 적이 있는(‘아니 왜 이 비누는 몇 분을 기다려도 굳지를 않아?’), 나처럼 성질 급한 인간에게 계량컵과 저울이 필요한 베이킹은 오랜 취미가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처음으로 만든 케이크는 정말 맛있었지만, 나는 ‘디저트는 그냥 좋은 데서 사 먹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좀 더 평소에 먹는 요리를 배우고 싶어 뿌리온더플레이트에서 마크로비오틱 채소 초밥 만들기와 현미밥 반찬 클래스를 들었다. 알록달록한 채소 초밥이 손님 대접 요리로 좋을 것 같아 신청하긴 했지만 내심 생선 없는 초밥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특히 표고버섯을 사용한 채소 초밥은 장어덮밥 같은 맛이 나서 고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권할 만했다. 그 외에도 집에서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된장국과 나물, 샐러드를 배워 평일 요리에 알차게 써먹었다.


표고버섯, 파프리카, 깻잎을 이용한 초밥
가지고지나물과 뿌리채소샐러드


비건 요리는 아니었지만, 산티아고 순레 길을 걸으면서 접했던 스페인 요리를 좀 더 배우고 싶어 스페인 요리를 다루는 마하 키친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손님맞이 코스로 낼 수 있는 여름 아몬드 수프, 앤쵸비 핀쵸, 감바스 알 아히요, 믹스 빠에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순례길에서 알베르게 필그림 메뉴로 그렇게 많이 먹었던 빠에야인데도 만드는 법을 본 건 처음이었다. 원래 빠에야는 스페인의 아버지들이 일요일 오후에 아내를 쉬게 하고 가족들을 위해 몇 시간씩 정성을 들여 만드는 음식이라고 한다. 빠에야는 양파를 제대로 볶는 데만 한 시간은 걸리는 어마어마한 요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의 사랑이란!


재료 손질과 가열에 한나절은 소요되는 정통 빠에야
아보카도와 계란, 앤쵸비를 올린 핀쵸(카나페)


요즘은 유튜브만 틀어도 온갖 쿡방과 레시피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요리를 배우기 위해 반드시 오프라인 클래스를 신청해 들을 필요는 없다. 다만 수업을 듣게 되면 강사들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 요리에 대한 철학, 그리고 그 요리공간이 주는 기운에 많은 힘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마하 키친의 신소영 셰프님 같은 경우, 요리가 너무 좋아 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날아가 요리를 배웠다고 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건강하고 윤리적인 재료를 선택하고,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정성이 담긴 요리를 사람들에게 맛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진심을 느꼈다. 진정성 있는 직업인은 아름답다. 내가 수업을 들었던 강사님들은 다 세상에 좋은 음식을 내놓고 싶다는 진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그분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직접 밥 해 먹는 뿌듯함에 대하여


처음에는 다분히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한 요리였지만 나는 점점 요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요리는 가장 실용적인 예술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채소들이 적당한 불과 물과 양념을 더해서 요리가 되어가는 과정은 늘 흥미진진했다. 유시민이 그랬었나. 모든 가사노동 중에 요리가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고.


요리를 가사 중에선 제일 괜찮게 생각해요. 집안일이라는 것이 요리를 빼면 모두 원위치시키는 노동이잖아요. 유일하게 최초와 달리 새로운 무엇이 나오는 건 요리밖에 없어요. 제일 싫어하는 일은 다림질이죠.”

(<씨네 21> 2009년 6월 707호 ‘김혜리가 만난 사람’ 유시민 인터뷰 중에서)

무엇도 될 수 있는 야채 꾸러미들


요리는 위로이기도 했다. 다른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회사를 안 간다고 모든 날들이 '슈퍼 그레잇' 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어떤 의미 있는 것도 만들지 못한 것 같아 쳐지는 날에는 카레를 만들었다. 냉장고 속 떠돌이 재료를 전부 썰어 넣어 카레를 만들다 보면 오늘 산발적으로 보낸 시간들도 언젠간 유의한 결과물로 연결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우울하고 쳐지는 날에는 시들어가는 사과에 설탕을 더해 달달한 사과잼을 만들었다. 가스레인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책을 읽으면서 잼을 젓다 보면 그 순간만은 타샤 튜더 할머니가 된 것처럼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요리는 소비하지 않고 창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좋은 버섯에 청경채와 숙주를 넣고 굴소스만 둘러도 중국집에서 사 먹는 비싼 ‘요리’와 제법 비슷한 맛이 난다는 것은 뿌듯한 발견이었다. 늘 김치를 사 먹기만 했는데, 혼자 처음으로 담근 깍두기가 생각보다 간단하고 맛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매일 집밥 해 먹기’를 통해 적은 돈으로도 건강하고 맛있게 먹고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외식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셈이다.


친구를 부를 때는 주로 파스타와 바게뜨빵을 함께 낸다
순한 브런치가 먹고 싶을 때는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만든다
불량해지고 싶은 저녁엔 피자를 굽는다


생각해보면 대기업 시스템 내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맡아 일하면서, 항상‘내가 시스템을 벗어나서 뭔가 의미 있는 걸 만들 수 있을까?’ 는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꾸준히 집밥을 해 먹으면서 적어도 내가 나와 내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책임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식단 기획, 재료의 구매, 완제품 생산, 출시와 피드백 수집까지. 여기서 직접 텃밭을 가꾸게 된다면 나름 식생활에 있어서는 자급자족 체계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다시 일하게 된다면 지금만큼 요리를 해 먹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무실 속 삭막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나는 또 ‘핫한 동네에서 평일 런치 먹고 싶다!’를 부르짖게 될지도 모른다. ‘쉬면서 맛있는 걸 더 많이 사 먹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열심히 일할 미래의 나에게, 때때로 힘들고 지칠 나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제철 채소를 부지런히 챙겨먹고, 생전 안 해본 요리에 도전하고, 친구들을 불러 요리를 해 줄 수 있는 여유로운 오늘이, 미래의 내가 더 건강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





삶의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반대의 과정, 즉 돈으로 해결하던 일들을 다시 가져와서 내가 몸으로 한다는 것을 의마합니다. 사실 가사노동은 어떻게든 해치워야 하는 허드렛일이 아니라 생존을 도모하는 '삶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웰빙'이라 불리는 참살이의 트렌드는 특별한 이벤트보다 일상적인 삶의 기본에 충실하고 그 질을 높이는 것이 행복의 기반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철에 맞는 신선한 먹거리를 고를 줄 아는 기술, 영양소 파괴를 줄이고 식재료 본연의 맛과 풍미를 살리는 요리 및 가공 기술, 웬만한 생활가구나 소품들을 스스로 만들어 애착을 가지고 사용할 줄 아는 기술,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알아가고 일상을 나누고 더불어 기여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기술...... 어쩌면 가사노동은 가족들과 삶의 과정을 공유하고 생존의 기술을 꾸준히 연마하는 일종의 공동 수련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먼 옛날 노예 제도가 있던 시절, 주인은 자신의 모든 가사노동과 허드렛일들을 노예에게 맡겨버리고는 사람들과 어울려 예술을 향유하고 시를 읊고 여행을 다니며 삶을 마음껏 누리며 여유롭게 지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인은 노예 없이는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등 뭐 하나 스스로 하지 못하는 무능력 상태가 되어 갑니다. 반면 노예는 계속 고되게 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빨래의 달인, 청소의 달인, 요리의 달인이 되어갑니다. 결국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입니다. 노동을 통해 직접 대상을 변화시키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는 것이 진정 자기 삶에서 주인 되는 길이란 거죠.

- 박미정, <적정소비생활> '나는 왜 항상 돈이 부족할까?' 중에서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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