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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r 17. 2017

곧 쉬러 갑니다

휴직을 앞둔 사람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마음껏 못생겨지고 있다. 앞으로 단정한 오피스룩 따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쇼핑의 욕구가 사라졌다. 몇 벌의 옷을 가지고 월화수목금을 돌려 입는다. 마스크팩 한 묶음을 사놓고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휴직하면 잠만 자도 피부미인이 될 것이다. 살찔까봐 늘 경계하던 간식, 야식도 그냥 먹는다. 난 원래 옆자리 차장님이 주신 초콜릿 하나도 고이 서랍에 넣어놓았다가 정말 힘들 때 꺼내 먹는, 절제의 아이콘이었다. 이제는 오후에는 모니터를 보면서 과자를 우적우적 먹고, 밤 10시에 김밥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면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낀다. 다이어트가 무슨 소용인가, 휴직하면 숨만 쉬어도 살도 빠질 텐데! (근거 없는 확신이었음이 곧 밝혀질 것이다.)


예전보다 주말 약속이 많아졌다. 전에는 주말엔 무조건 조용히 집에서 쉬었다. 약속을 잡더라도 대부분 토요일에 잡았고 일요일 오후부터는 대개 집에 있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적인 사람이므로, "그러면 나중에 너무 피곤해"라는 말로 선을 긋고 약속의 상한선을 정했다. 항상 충전기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는 배터리 같았다. 이제는 곧 긴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막 밖으로 나다니게 된다. 최근에 새로운 사람들을 주말에 많이 만나고 있는데, 오랜 시간 밖에 있음에도 소모하는 에너지보다 새로 받아오는 에너지가 많은 것 같아 신기하다.


일이 전보다 잘 된다. 이제 곧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일을 일로 대하게 된다. 갈등이 두려워 남을 강하게 푸쉬하지 못했는데 전보다 000 언제까지 해주세요, 라는 말을 더 쉽게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맡은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게 큰 조직에서 나 한 사람 따위, 금방 대체가 될 것임은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없는 자리가 조금은 표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1년여의 시간 동안 돈은 없고 시간만 많은 사람이 된다. 그동안 공부한답시고, 일한답시고 너무 재고 살았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나는 "항상 뭔가를 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동네 미용실의 아주머니마저, "학생은 왜 그렇게 매일 빨리 걸어 다녀? 많이 바빠?" 할 정도였다. 입사한 뒤에는 "일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나는 순순히 시간 부자가 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다. 엄마와 아침드라마를 보고 친구들 회사 앞에 찾아가 점심을 먹는, 천하제일 백수의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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