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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r 09. 2017

일기장을 폈다

원형의 나를 찾아서

휴일을 맞아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모두 읽었다. 휴직을 하면 한 번쯤 해 봐야지, 했던 프로젝트다. 사관이 사초를 살피듯, 제삼자의 눈으로 자료를 분석하듯 초등학교 때 쓴 그림일기부터 몇 달 전 쓴 일기까지 모두 읽었다.


간단히 학창 시절 단계별로 감상을 요약하자면,

1) 초등학교 일기장을 두 권 읽었을 즈음

 - 아이는 정말 솔직하다. 아직 사회화가 덜 진행된 원형의 내 모습들을 보았다. 초등학생 때 행동하던 방식, 생각하던 패턴이 그대로 어른이 된 나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공동체 속에서의 모습, 친구 관계에서의 모습, 심지어 새로운 과제를 대하는 태도까지도.


2) 중학교 일기장으로 넘어갔을 때

- 왜 중2병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알겠다. 어디서 바람만 좀 불어와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자의식 과잉의 여중생을 만났다. 아마 당시 한창 벤치마킹(?)하며 읽었던 <안네의 일기>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 일기장을 읽을 때는 아, 그래도 지금 내가 많이 컸구나! 난 지금의 내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고등학교 일기장

- 본격적인 입시 경쟁이 시작되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과 유사한 패턴의 걱정, 불안, 지친 모습이 보였다.


가족신문을 만들며 들뜬 한 초등학생의 일기


"침이 마르게 칭찬을 들을 정도로" 잘 하고 싶었고

"설레어서 잠도 못 잘 것"처럼 몰입했고

"아주아주아주 잘"해서 계속 보관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어 했던 아이.

 약 십오 년 뒤 이 아이는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고 출장지에서 밤새서 보고서를 쓰고, 발표를 좀 더 잘해 보려고 몇 번이고 스크립트를 고치고, 즐거운 송년회를 위해 대형 주루마블을 그리는 회사원이 된다.


어느 집순이 초등학생의 일기


"조금이라도 바깥에 있기를 싫어하는"

"밖에는 죽어도 나가고 싶지 않은" 집순이 초등학생.

사실 이 일기는 나의 내향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자기가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려는 고집을 보여준다.

다행히 사회화의 결과로 점차 싫은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고 어렸을 때보단 좀 더 유연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약 십오 년 뒤 이 아이는 회사를 휴직한다...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슬퍼하는 초등학생의 일기


"최선을 다했는데"

"앞으론 꼭 잘 해야지"

"꾸중을 들을 때에는 나 자신에게 벌을 주기로" 할 정도로 비판에 민감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아이.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살아서 좋다는 학교 좋다는 직장에 다녔지만

항상 힘들었던 것은 마음 한 구석에 '못하면 벌주는' 자아 하나를 데리고 살아서였다.


이젠 벌주기 싫고 벌받기 싫다.

하기 싫은 것을 다 안 할 순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하고 싶다.

설레어서 잠도 못 자는 일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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