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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r 08. 2017

라라랜드 보고 휴직한 사람

일년간의 준비, 그리고 두 번째 시도

항상 한번 마음먹은 건 기어코 해야 한다고, 믿고 살아왔던 나는 내가 휴직 의사를 번복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분명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나를 번복하게 했던 걸까? 나는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걸까?


이 에피소드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1) 나에게는 안정감도 중요하구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큰 불안감을 느끼는구나.

성장, 변화, 모험을 꿈꾸는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현실주의자, 안정주의자에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는 두 가지 성향이 다 강한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땐 이것도 저것도 놓지 못하고 쩔쩔매다 대세를 따라 안정을 택하곤 했다. 내가 했던 일부 "모험적인" 선택들은 항상 Plan A, B, C를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기업을 다니면서, 업무와 주변인들의 영향으로 나는 조금 더 안정을 중시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매일의 루틴한 생활에 적응되었고,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당연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두려워졌고, 그것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툴을 만드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여행 가기 전 엑셀로 계획표를 짜고, 매달 입출금 내역을 엑셀로 기록하여 통계를 내고, 갑자기 지출이 늘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 "경조사비" 통장을 따로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2) 그럼 내가 모험을 하려면 철저한 백업 플랜이 필요하겠구나.

휴직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느낀 불안 요소들은 다음과 같았다.

- 부서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복직 후 적응이 어려울까봐 걱정된다.

- 내년이 연차상 승진 해인데, 진급 누락이 당연시된다.

- 이런 갭이어가 나에게 가치있는 것은 알겠으나, 휴직 후 매달 무엇을 할 것인지 분명한 플랜이 없다.


나는 일 년에 걸쳐 이 불안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 새 부서에서 열심히 일하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포인트를 작게나마 찾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 그 결과로 진급을 했다.

- 자전적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내가 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외 여러 진로 탐색을 통해 휴직 후의 Plan A, B, C를 마련했다.

  (이 부분은 독서, 수업,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보완 중이다)


불안 요소를 제거했음에도 관성을 깨고 "저 휴직할래요"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제까지 했던 일을 오늘 또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제 하지 않은 일을 오늘 새로 시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어제 했던 일을 이제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던 어느 날, 출근길에 멍하니 버스 창밖을 바라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오늘 출근하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난다면, 그래서 내가 죽는다면, 나는 순순히 네, 하고 저 세상으로 못 갈 거야. 잘 살아보겠다고 맨날 걱정하고 준비면서 살았는데, 하고 싶은 거 결국 근처에도 못 가고 죽어서, 그게 한이 되어서, 구천을 떠돌 게 분명해. 지박령이 되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힐지도 몰라. 막 공부하는 학생들 책 떨어뜨리고, 출근하는 직장인 다리 부러뜨리는 귀신이 될지도 몰라.


그 엉뚱한 상상 후, 나는 내 선택을 무조건 지지해줄 사람들만 만났고 내 선택에 괜찮다고 말해줄 책과 영화들만 골라서 보기 시작했다. 영화 라라랜드도 그 중 하나였는데, 주인공 미아의 노래, Audition(The fools who dream)를 몇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A bit of madness is key
To give us new colors to see
Who knows where it will lead us?
약간의 광기는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한 
새로운 색깔을 보게 해 줄 거야
그게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누가 알겠니


살짝 미친 사람 앞에 놓일 알록달록한 인생이 궁금해졌다. ‘A bit of madness is key’라는 가사가, ‘A bit of 

madness is okay’(살짝 미쳐도 괜찮아) 로 들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센 강에 맨발로 몸을 던지고도 그 경험을 후회하지 않던 미아의 이모처럼, 나는 한번 충동에 몸을 던져 보기로 했다. 


부서장과 몇 번의 면담을 걸쳐 휴직 날짜를 확정했다.

결국, 사람을 새로운 선택으로 이끄는 것은 철저한 준비가 아니라 상상력과 충동인가 보다.


나는 유순하고 착한 귀신이 될 것이다.

 




Lalaland - Audition(The fools who dream) scene 

https://www.youtube.com/watch?v=SL_YMm9C6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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