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빠에게 독립출판물을 낸 것을 고백했을 때, 아빠는 말했다.
"큰딸, 아빠가 니 책 백 권 정도는 사주고 싶은데 어디서 사면 되노. 니한테 사면 되나."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히 활발하게 영업 일을 하는 아빠의 인맥을 고려하면 정말로 백 권은 사서 돌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남의 차에 이리저리 굴러다닐 내 책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나는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빠, 인쇄를 백 권밖에 안 했는데 아빠가 백 권 사면 어떻게 하노? 이거 한정판이라서 진짜 꼭 이 책이 필요한 사람한테만 팔 거다. 2쇄 찍으면 말해줄게 살 거면 그때 사라."
그래서 아빠는 딸내미가 책냈다고 사방팔방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딱 다섯 권만 샀다. 판매지수를 올려주고자 일부러 네이버 쇼핑에 뜬 온라인 서점에서 사고 정성스럽게 별점 5점을 남겼다 했다. 그 뒤로 나는 독립출판물을 몇 쇄 더 찍었지만, 이 책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팔고 싶다는 내 말에 아빠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았다.
이젠 아빠가 백 권을 살 수 있는 책을 냈다. 음, 아무래도 아빠가 백 권을 사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출간 준비과정 내내 쿨했던 엄마가 늘 꽃 아니면 풀이었던 본인 카톡 프로필 사진을 내 책 사진으로 바꾸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누가 보더라도 볼 테니 아무래도 홍보 효과가 있지 않겠냐고 했다.
집에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 아빠는 책은 잘 팔리고 있냐고 묻는데, 이게 상당히 부담이 된다. 통화를 마치고 엄마 프사 밑에 적힌 문구("삶이 팍팍한 당신에게 아주 작은 여백의 시간을 선물하는 책!!" )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아 엄마 아빠한테 책낸다고 말하지 말걸...... 그럼 영영 모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지인들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 책은 잘 팔려? 다음 책은 준비하고 있어? 나는 그 질문 앞에 또 긴장한다. 그건 휴직하고 나서 받았던 '그래서 너 휴직하고 뭐하니?'라는 질문처럼, 별로 평가적인 의도가 없는 안부인사에 불과한데도. 책이 잘 안 팔리는 걸 들킨 것 같고, 판매 부진은 내 글이 구린 탓인 것 같고, 마감 후로 아무것도 안 쓰고 팽팽 놀기만 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주절주절 TMI를 한다.
"응 막 잘 팔리는 건 아니야. 그냥 조금씩 팔리고 있어. 다음 책은 딱히 계획이 없어. 뭐 안 쓰고 노는 건 아닌데...... 잘 안 써지네? 조금 지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미국에 처음 간 유학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웃집 사람의 What's up?이라는 일상적인 안부인사에 '응 잘 지내죠~ 당신은요?'라고 답변하면 될 것을, 진지하게 본인의 근황을 주절주절 얘기해서 ('논문은 안 써지고...... 우리 랩 교수님이 나를 힘들게 하고..... 영어는 어렵고...... 나는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 상대방을 당황하게 했다는 에피소드.
누가 What's up?이라고 내게 묻는다면 난 뭐라고 답을 할까. 응 별일 없이 지내, 정도가 맞을 것 같다. 내심 책을 낸 이후의 생활에 큰 변화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역시나 그런 건 없었다. 사실 책 출간일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다. 마감하느라 고생한 나에 대한 선물이기도 했지만 혹시 책이 너무 잘 되어서(!) 또는 책 홍보를 위해서 남들 앞에 설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젠 그때 다듬었던 머리가 다시 자라 지저분해졌다. 그치만 아무래도 미용실을 굳이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의 신기하고 뿌듯한 마음도 잦아들고, 주변인들의 우와 대단하다 축하한다 하는 칭찬들도 지나간 자리에, 덥수룩해진 머리와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만이 남았다.
회사생활은 똑같다. 책에는 일 년을 쉬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얻고 돌아온 것처럼 썼지만, 사실 일도 힘들고 사람도 힘들고 복직해 일 년 반을 일하고 나니 이제 몸도 힘들다. 불행에 익숙해질까 봐 두렵다. 그래 돈 버는 거 힘들지, 근데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 하고 이야기하는 꼰대가 될까 봐 두렵다.
계속 튀어 오르는 두더지를 뿅망치로 내리치듯이 업무를 쳐내고 쳐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오늘은 이쯤 하자, 남은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마음을 먹고 파일 창들을 하나씩 닫을 때쯤,
“우리 팀 다들 요즘 수고가 많은데, 오늘 가능한 사람들만 쏘주 한잔 할까?”
상사가 '번개'를 제안한다. 우물쭈물하다가 '전 오늘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어서요'라고 말할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저번 회식에도 불참을 해서 아무래도 오늘은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오늘은 오랜만에 요가도 하고, 집에 가서 그동안 방치해 놓은 브런치에 글도 써 보려 했는데......
예정에 없었던 회식에 끌려가 맥주잔을 앞에 두고서 단호하지 못했던 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술자리 대화 사이에서 볼이 터져라 열심히 웃다가, 잠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광대 근육을 정리하며 생각한다.
'아까 그 농담 솔직히 좀 웃겼다. 이거 언젠간 글로 써야지.'
그래, 단 한가지 달라진 일상은 이것이라고, 방금 전 상황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면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