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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Nov 17. 2019

'그건 그렇다 치고'가 안 되는 마음

회사의 언어, 문학의 언어

"야, 보고서 내용이 이게 뭐냐?"

대형 판매 이슈에 대한 보고서 앞에서 임원의 짜증 레벨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가 이런 거 이제 좀 들고 오지 말라고 했지. 아오 그냥 이걸 확."

임원은 손을 들어 옆에 앉은 팀장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팀장은 거의 이마 앞까지 다가온 임원의 손 앞에서 웃음을 지었다. 회의록을 쓰던 나는 그 광경을 봤다. 팀장의 웃음이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임원은 팀장을 치려던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어떻게 할 건데?


20여 년을 몸담은 회사에서 임원을 단 그는 '회사의 언어' 네이티브다. 회사의 언어에서 주로 쓰이는 표현은 이런 것들이다. 오케이,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네 전략이 뭔데? 그렇게 하면 매출 얼마 느는데? 우리는 그들이 그 대사를 마음 편하게, 가장 폼나게 칠 수 있도록 돕는다. 복잡하게 얽힌 사안들의 본질을 파악해 가장 간명한 언어로 정리한다. 답은 이미 (윗분이 듣고 싶은 말로) 정해져 있다. 어차피 '답정너'라면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게 베스트다. 정해진 답을 뒷받침해줄 근거자료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가공하여 테이블에 올린다.


현황, 당사 대응 전략 1, 2, 3, 액션 아이템, 마감기한, 담당자 누구누구. 땅땅땅.


회사의 언어는 심플하다. 회사의 언어는 죽은 아이 나이를 세지 않는다. 죽은 아이는 이미 죽은 아이일 뿐이다. 벌어진 일은 그렇다 치고, 그 과정에서 잘해보려 애쓰다 상한 마음은 그렇다 치고, 다음 대책과 전략을 찾는다. 회사의 언어는 둔감하다. 그 둔감함의 힘으로 복잡한 내용도 최대한 구조화해 단순화시킨다. 회사의 언어는 단호하다. 박완서의 『미망』에 등장하는 화자의 대사처럼, 단칼에 현재와 미래를 구분지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언어다.

                      

"외삼촌 제발 그만허세요. 그건 잘됐을 때 얘기고 우린 시방 잘된 게 아니잖아요. 죽은 아이 나이 세기나 헐 게 아니라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허고 싶어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해 만난 회사의 언어는 마치 새로운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여느 외국어가 그렇듯이 초반에는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게 재미있어, 동기들과 저녁 약속을 잡을 때도 꼭 회사 공문 같은 장소 공지 메일을 보내곤 했다. 회사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선배들은 마치 불어로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처럼 멋있어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어떤 이슈를 맞닥뜨리더라도 마치 머릿속에 지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현황과 대책과 액션 아이템을 깔끔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길 바랐다.


나는 점점 회사의 언어를 내 인생에도 써먹기 시작했다. 그게 철든 어른의 언어 같았기 때문이다. 출근길, 퇴근길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나 자신에게 꼭 임원처럼 굴었다.


- 회사가 힘들어. 일도 적성에 안 맞아. 출근하면 몸이 아파.

- 그렇다 치고, 어떻게 할 건데?

-......

- 답은 정해져 있는 거 알지? 계속 다니거나, 나가거나.

-......

- 나갈 깜냥이 없으면 다녀야지. 나갈 거면 넥스트 스텝 대책을 세워야지. 1번 이직, 2번 진학, 3번 창업, 4번 백수.


'그건 그렇다 치고'가 안 되는 마음은 이 명료한 알고리즘 안에서 길을 잃는다. '현실은 알겠는데, 그래도 힘든 이 마음'은 회사의 언어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치유할 언어를 찾아 단편소설 쓰기 수업을 신청해  들었다. 회사의 언어로는 달래지지 않는 마음에 대해 허구의 인물을 빌어 썼다. 단편소설 속 인물 '김 차장'은 힘든  회사 생활을 견디기 위해 기억을 잃는 약을 먹는다. 기억을 잃으며 역설적으로 회사에서 최고로 유능해진 차장이 마지막에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걸 알게 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 아닌 소설을 완성하고 나자 회사가 좀 견딜만해졌다. 문학의 언어는 회사의 언어보다 쓸만했다.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와, 오늘 보고의 결과를 공유하는 메일을 쓴다. 현황, 대책, 향후 진행 방향에 대해 임원 컨펌을 받았다고 회사의 언어로 쓴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포스트잇을 뜯어 끄적인다. ‘아오 그냥 이걸 확. 임원이 손을 들어 팀장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팀장은 그 앞에서 웃었다. 나는 그걸 봤다.’


다른 일을 하다가 포스트잇을 하나 더 뜯어 휘갈긴다. '그런데 모멸감은 왜 나의 몫인가.'


아까 팀장의 그 웃음을 뭐라고 써야 할까 잠시 생각한다. '비굴한 미소'. 아니, 비굴함은 선택하는 것이지. 어쩌면 그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오랜 습관 같은 멋쩍은 미소'. 아니, 사실은  권력 앞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다시 오늘의 상황과 사람들의 표정을 다시 세세히 떠올려본다. 혹시 팀장은 '전략적 선택'으로 웃은 걸까. 웃기로 선택을 한 거라면, 그건 얼마만큼이 온전한 그의 선택일까.


퇴근길 마음에는 오늘 보고 들었던 것들이 잔뜩 고인다. 집에 돌아와 회사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말들을 쓴다. 문제-대책의 알고리즘으로 걸러지지 않는 마음,  숫자로 가득한 엑셀 칸에는 들어갈 수 없는 말들, 워드 보고서에는 차마 쓸 수 없는 단어들이 백지 위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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