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돌 Aug 25. 2019

남이 뱉은 씨가 목에 걸리는 날

남의 말에 상처 받지 않는 법

말로 얻어맞는 것 같은 날이 있다. 오래전 얻어맞아 멍든 자리가 다시 부어오른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 그냥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해도 아프다.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 진짜 저 사람 너무 싫어.' 싫다는 감정이 나를 압도한다.


불안 경보가 울린다. 삐용삐용. 너 그러다 저번같이 아플지도 몰라. 조심하라고.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가라고.


남의 말에 얻어맞아 오랫동안 아팠던 적이 있다.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목이 막히고 가슴이 갑갑하고 소화도 되지 않았다. 가슴이 열로 가득 찬 듯이 답답했다. 무엇으로도 그 갑갑함이 가시질 않아서, 참을 수 없이 소리를 지르고 싶어서, 퇴근하고 회사를 빠져나오고 나면 가까운 공원으로 뛰어가 아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침을 맞으면 도움이 될까 해서 한의원에 갔다.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매핵기라는 진단명을 내려 주었다. 매핵, 매실의 씨앗이 목에 걸려 있다는 아름다운 병명이었다. 나는 남이 힘주어 뱉은 씨가 포물선을 그리다 떨어져, 무방비로 벌어져 있던 내 입에 들어와 목에 콱 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그 씨앗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얼마 후 나를 힘들게 한 상황과 사람을 벗어나게 되어 겨우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삼킨 씨앗은 어떻게든 자국을 남긴다. 한번 아팠던 곳은 쉽게 다시 아프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때 크게 데인 뒤로는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몇 배로 과민 반응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본다.


이제는 가능하면 처음부터 남이 뱉은 씨를 내 안으로 삼키지 않으려고 한다. 너는 뱉어라, 나는 안 받는다, 는 자세를 마음에 새긴다. 다시는 그런 문학적인 병에 걸리고 싶지 않아서다. 여전히 잘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책 속에서, 스마트폰 속 세계에서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말들을 발견하면 소중히 주워 모아 둔다. 그 말들을 방패 삼아 전장에 나가고, 그럼에도 꼼짝없이 얻어맞은 날에는 그 말들에 기대어 마음의 상처를 돌본다.


나의 스크랩함에서 꾸준히 활약하며 나에게 방패가 되어 주었던 방법들을 소개한다. 남이 뱉은 말에 얻어맞아 아파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그 말이 마음에 걸려 소화를 못 시키고 밤잠을 설칠 누군가를 위해, 이 글은 좋은 글과 방법을 찾을 때마다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1) 이해하려 하지 말 것

트위터 @dodaeche_J, <이상한 사람을 만난다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아니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고 질문하게 된다. 옆 동료에게 "저분은 원래 저러시나요? 아님 저한테만 이러시나요? 언제부터 저러셨나요?"라고 묻게 된다. 도대체 어떤 경험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자질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의 개인사를 캐묻고 싶어진다. 그의 혈액형과 MBTI와 애니어그램을 알고 싶어진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빠르게 도망가자. 궁극적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무례한 공격을 당한 우리의 그릇은 아직 그만큼 크지 않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우선 도망가자, RUN!




2)    그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말기


“근데, 회사에 다니면 이상한 사람 엄청 많지 않아요?”
“어휴, 별별 사람이 다 있어요. 정말, 이 작은 회사에도.”
“그럼 너무너무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음, 그냥 무시해요. 싫어하는 사람에게까지 줄 마음이 어디 있어요.” 오랜 내 고민이 순식간에 싹둑 잘려나가는 순간이었다.
-김민철, <하루의 취향> 중


무엇이든지 에너지를 주면 자란다. 생각을 계속하면 생각이 커진다. 누가 나에게 이랬어, 정말 너무하지 않니, 어떻게 사람이 그러니, 하고 계속 마음과 신경을 쏟기 시작하면 그 싫다는 마음만이 남아 나의 일상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이 상황을 벗어나면 다시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볼 일도 없을 사람에게 너무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주지 말자. 싫은 사람에게까지 줄 마음은 없다.




3)    나 자신에게 2차 가해 하지 않기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비판의 고통은 다른 사람이 하는 공격보다 그것에 대한 자신 내부의 반응에서 온다. 예를 들어 클레어의 남편이 "오늘 밤에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인데 집이 깨끗하지 않은 것 같군요."라고 말했을 때 클레어는 이렇게 소리쳤다. "나도 집이 깨끗하지 않다는 건 알아요. 주부로서 자격미달이죠. 집이 엉망이에요. 그래요. 난 지저분해요. 알고 있다고요. 날더러 뭘 어떡하라고요?" 클레어는 남편이 던진 메시지를 열 배나 확대했다.

내가 클레어에게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막대기를 던지면 그 막대기를 집어서 당신을 때릴 건가요?"라고 물었을 때 클레어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당신은 이 막대기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 파멜라 버틀러, <행복을 부르는 자기 대화법>


누군가가 던진 말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내 안에 그의 말에 동조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잖아. 내가 못한 거 맞잖아. 더 노력했었어야지. 넌 힘들어할 자격도 없어.'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이 던진 막대기를 집어 들어 나 자신을 때리고 또 때리는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 부당한 공격을 당했을 때,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아니 이놈 뭐야? 왜 나한테 이래?'라고 하지만 나 자신에게 비판적인 사람은 '그래 내가 맞을 짓을 했지......'하고 그 비난을 흡수해 버리고 만다. 내가 나 자신의 편이 아니라 남의 편에 설 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상처 입는다.



어떻게든 나 자신을 비난할 거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급기야 '고작 이런 일에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힐난하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나만 예민하게 왜 이럴까. 왜 나는 이렇게 대인관계에 면역력이 없을까. 왜 저런 사람에게 대응을 제대로 못할까.


부처는 세상에 여덟 가지 고통이 있다고 했다.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원증회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인 애별리고와  당당히 어깨를 같이하고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고통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통과 비슷한 레베루라는 것이다.


그러니 왜 이런 일로 나는 힘든가, 왜 나는 매번 대인관계에서 이렇게 스트레스받는가 하고 나를 자책하지 말 일이다. 이것은 무려 부처님이 인정한(!) 고통이다.




4)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또한 예민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생각, 기대에 민감하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강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용납하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지 잘 감지한다. 이런 섬세한 감수성은 예민한 사람들을 적응의 귀재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 중에는 어릴 적 자신이 상대방의 색깔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상대의 색깔로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상대의 입장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상대의 눈으로 지각했다고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 롤프 젤린, <예민함이라는 무기>


무례한 사람은 자기 할 말을 다 한다. 욕망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부정적인 정서도 거침없이 표출하며 그것을 때론 자랑으로 여긴다. ("나, 할 말 참고는 못 살잖아.") 남의 욕구에 민감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민감하게 캐치해 내고 그것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끼곤 한다. 처음에는 그의 언행에, 나중에는 그가 표현한, 또는 표현하지 않은 욕구(직접적으론 요구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내가 이렇게 해 주길 바라는)에 압도되어 계속 그 생각만 하게 된다.


그럴 때는 잠시 마음의 발길을 돌려,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뭔가를 원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나는 어쩔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걸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가? 그것은 나에게 얼만큼 중요한가? 나는 이 관계를 위해 얼만큼 희생을 하고 싶은가?


그의 기대는 그의 기대일 뿐이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 기대는 본인이 알아서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 내 기대를 알아봐 줄 사람,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은 나 뿐이다. 그러니 저 사람은 왜 저러지?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를 묻자. 저 사람은 왜 나한테 저런 걸 원하지? 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로 주의를 돌리자.




5)    그 일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주문


관계의 압박이 강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고통스러울 때면 '설마 나를 죽이겠어'라는 말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그 사람을 안 보면 그만이지 죽을 일은 아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최후방의 선을 그은 후에 관계에서도 '이 정도면 됐어'의 선을 긋고 최소한의 관계를 이어나갈 최소 충분조건을 맞춰보자.
 - 하지현, <고민이 고민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싫은 말을 하고 적의를 드러내는데, 그런 사람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설마 나를 죽이겠어?'라는 주문을 외우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의연해진다. 힘든 건 맞다. 그치만 그 일이, 그 상황이, 그 사람이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내 인생이라는 책에는 수많은 페이지가 있고, 그 일은 그중 한두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한 두 페이지가 아무리 별로더라도 나라는 책 전체를 망칠 수는 없다.




6) 나에게 힘을 주는 일을 찾아서 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에게 힘을 주는 일들의 리스트를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힘들 때마다 챙겨 본다. 유독 힘든 주에는 이 중에 무엇 무엇을 했는지 체크해 본다. 그럼 십중팔구 리스트 중에 한두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나는 어떤 일에 설레는지, 어떤 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무엇을 하면 내 기분이 좋은지 잘 기억해 놓고 나에게 선물하듯이 실천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폭력: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법>의 번역자 이슬비님의 블로그에는 '자기돌봄 도구상자' 란이 있다. 힘들 때 하면 도움이 되는 일들을 모은 리스트인데, Google Docs 형태로 누구나 추가하고 편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리스트를 보면서 나만의 '자기돌봄 도구상자'를 만들어 보자. 그리고 한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면, 한 가지 좋은 일을 나에게 꼭 해 주자.  


https://blog.naver.com/getz27/221323506610







그동안 남이 생각 없이 뱉은 말들을 소중히 주워 담아 꿀꺽 삼켜버리진 않았는지, 그래서 그게 내 목에 걸려 피가 나는데도 아파하는 나를 모른척하고 있진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내 목을 막히게 하고 숨을 갑갑하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던 그 씨앗들을 이젠 내려보내고 싶다.


그런 사람, 그런 일 따위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두지 않겠다는 다짐, 너는 이만하면 잘했고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자기 칭찬, 나를 기운 나게 해 줄 일을 찾아서 하는 사려 깊은 마음. 그 따끈하고 미끈한 마음을 타고 어제까지 나를 아프게 한 그 씨앗들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지는 상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