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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쌤 May 12. 2020

2020년 이야기-코로나 걸린 것 같아요!

한국이 올 초부터 코로나로 인해 힘든 건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신천지 환자 폭증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딸의 건강문제로 급하게 한국을 가야만 했다.

학교엔 4주 무급휴가를 내고 3월 4일 출국.


토론토 공항에 도착해 몇 시간 대기할 동안 마스크 쓴 이들은 한국인이거나 동양인. 

그것도 몇 명 되지 않았다. 

핼리팩스는 이미 마스크 사재기가 시작되어서 먼지만 막아주는 마스크를 겨우 구했고, 

그걸 쓰고 비행기에서 10시간 넘게 있으려니 답답하고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겼다.    


한국에 도착하니 열감지 카메라와 손세정제가 곳곳에 배치되어있고,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한국도 마스크 사기가 힘든 때여서, 동생들이 택배로 보내 준 소량을 아껴 쓰고 있던 중에 곧 마스크 판매 5부제가 실시되어 2장씩은 살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썼을 뿐인데 귀가 아팠다.

저 많은 사람들은 지금 몇 달째 쓰고 다니는 걸 텐데 하면서 참아보았다.      

당시는 2주 자가격리가 의무가 아니어서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었고, 캐나다에서 왔다는 이유로 건물 입장이 제재받진 않았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들어가니  열감지 카메라가 모든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체크하고, 열이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직원이 미접촉식 체온계로 다시 한번 재주는 모습에 감탄했다.                 

사진출처:구글이미지



친정과 시댁, 친구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지방에 내려가지 않고, 얼굴 보러 온다는 지인들도 오지 못하게 했다. 

3년 만에 그것도 꽃피는 봄에 왔으니 코로나만 아니면, 방방곡곡 놀다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내가 언제 이렇게 방콕 하며 쉬어보겠나 싶어서 숙소에만 있었다.    

숙소에서 병원과 마트만 다니는 단순한 동선에서도 

혹시 저 사람이 보유자일까?

내가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항상 조심스러웠다. 

내가 타고 있으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걷는 사람이 기침을 하면, 뒤에서 걷는 난 긴장이 되었다. 

들리고 보이는 기사는 온통 코로나 이야기.

한국에 와서 개통한 임시 폰엔 확진자의 동선과 함께 새로운 경고 문자때문에 수시로 알람을 울렸다.


무리한 일정으로 피곤해서였는지, 며칠 후 인후염 증상이 있어 약을 사 먹었다.

인후염이 나을 무렵 근육통도 있는 것 같고, 기사에서 봤던 코로나에 걸리면 하얗게 변한다는 폐가 내 폐인 양 걱정이 걱정을 낳았다. 

그러고 나서 시작된 나의 고민

코로나 대처가 힘들 캐나다에서 아프면 어쩌지?

여기서 치료받고 면역을 획득해서 갈까?

이때에는 2차, 3차 재감염의 케이스가 발생하지 않았어서 한 번 완치가 되면 재발은 생각도 않던 시기였다.


캐나다의 무상의료는 이상적으로 보이나, 실체는 전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이제 발견한 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준비가 되어있을 턱이 없었다. 

어차피 나와 큰아이는 한국에 있으니, 조건이 허락한다면, 남편과 둘째를 한국에 들어오게 해서 이사태가 끝날 때까지 있다 돌아가자고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둘째의 출석문제도, 남편의 새 직장도 걱정이어서 당연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이때는 학교의 휴교가 연장되다가 그대로 졸업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니 여기서 아픈 게 낫겠다 싶은데, 

무서운 건, 사람들의 시선.

이름은 공개하지 않지만, 나이, 성별, 출신지, 동선이 공개된 문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받고, 기사를 읽고 있었다.

확진이 된다면, 캐나다 모녀의 동선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간 곳들이 다 밝혀질 것이고, 

우리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지만, 그 병원들과 식당 운영에 피해가 가는 것도 염려가 되었다. 

우리가 간 대부분의 식당들은 손님이 없어 넓은 홀에 우리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오던 날부터 동선을 적어놓은 것을 보고 

딸은 엄마 착한 확진자 되려고 그래? 하며 놀렸지만, 여러 가지가 맘에 쓰였다.     


생각보다 병원 일정이 빨리 끝나서 일찍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여행사 측에서 변경 요금 없이 출국일자를 변경해준다는 연락이 왔다. 

매일같이 항공편이 취소되는 나날들이어서 이러다 국경이 닫히려나 싶어 제안받은 날짜로 출국일을 변경했다. 


계속되는 고민 끝에, 월요일이 출국인데 토요일 아침에 선별검사를 받으러 갈 채비를 했다. 

15만 원을 내야 했지만, 음성인 걸 알고 가야 캐나다로 돌아가는 맘이 편할 것 같았다.

내 연락을 받은 동생이 이미 흥분한 누나를 전화로 말리지 못하고, 대신 코로나 상담센터에 전화를 한 모양이다. 

선별 진료소에 가면 오히려 감염이 될 수도 있으니, 가까운 내과에 가보라는 상담원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어차피 의료보험공단에서 해준 무료검진과, 추가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개인 병원으로 가기는 해야 했다.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의사는 이틀 전에 찍은 CT상에 폐가 아주 건강하다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믿지 못하는 나에게

제가 원래 청진기를 4-6번 정도 대는데 특별히 8번 대서 진찰해드릴게요.

하면서 청진기를 꾹꾹 눌러 음성임을 추가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월요일 출국 날, 오전에 들른 병원과 은행에서 열이 37.5도까지 체크되어 센서가 경고음을 내었다. 

창피하고 당황스럽고... 

간호사는 공항에서 세 번이나 열 체크한다면서 오늘 출국 못할 수도 있겠다고 겁을 주었다.     

이후 시간부터, 탑승 전까지 열을 내리기 위한 온갖 수단이 동원되고 다행히 36도로 무사통과했다. 


혹시라도 열이 다시 올라서 토론토와 핼리팩스 공항에서 탑승이나 입국이 거부되면 어쩌나 싶어 기내에서도 걱정을 했다. 

물을 계속 마시고, 찬물로 여러번 세수하고 내린 내 정성이 무안하게, 토론토 공항에는 열감지 카메라, 체온계, 손세정제 이 모든 게 없었다. 

3월 17일, 인접한 뉴욕과 토론토 자체에도 환자가 폭증이 된 시기인데도  그전에 비해서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늘었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


핼리팩스 공항에 내리니, 토론토와 마찬가지로 배치된 것들이 없이 2주 격리를 권장한다는주의사항이 담긴 유인물 한 장 주고 끝이었다. 

그 종이를 배부하던 직원들 역시 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곧 국경을 폐쇄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봄방학 이후로도 휴교가 연장되어 부담 없이 격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나의 억측과, 실제로 생긴 몸의 증상들로 811 상담전화를 했지만, 코로나 유사증상이 없다는 번호를 선택해서인지 내 전화는 끝내 연결이 되지 않았다.      


2주가 지난 이후로 지금까지, 남은 식구들 모두 무사한 걸로 보아선 난  코로나 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계속되는 증상들이 있어서, 의사와 그 퍼즐을 풀고 있다.  


의료시스템의 체계가 달라 

이곳 나를 포함한 한국인이 느끼는 두려움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요즘 환자 증가 폭도 줄고, 여러 제재도 조금씩 풀리는 듯해서 상항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코로나가 무섭긴 했어도, 일단 걸리면 잘 치료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오히려 한국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환자 숫자는 적지만, 대응할 의료시스템이 빈약한 캐나다로 돌아오며 깨진 내 강철 멘탈은 지금도 회복 중이다. 

내겐 공포심이 실제로 얼마나 몸도 마음도 아프게 할 수 있는지 알게 한 실험 같았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모두들 건강히 잘 버텨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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