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상의 지도를 단일 잣대로 납작하게 만들 때 생기는 문제들
K-페미니즘을 두고 “소비주권주의로 변질되었다”거나, “페미니즘의 이상형은 구조를 심문하는 진보적 테제여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전제가 숨어 있다.
바로 페미니즘은 단일한 이념이며, ‘진정한’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실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
교차성 페미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등,
수많은 흐름과 내부 긴장으로 구성된 거대한 사상의 대륙이다. 이 전체를 단일 기준으로 줄 세워 버리면, 그 안의 복잡성과 역사적 맥락은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마치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모두 “작은 정부”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예컨대, 사회자유주의자인 존 롤스는 적극적 복지국가를 옹호했고,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제한적 정부 개입을 긍정했으며, 자유지상주의자 로버트 노직과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각각 다른 이유로 정부 축소를 주장했다.
네 사람은 같은 철학을 공유하지 않음에도,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공통점만으로 한 줄로 세울 수는 없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소비를 해방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가 있을 수 있고,
소비 자체를 자본주의의 굴레로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진정한 페미니즘의 기준” 하나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부 논자들은
“페미니즘의 이상형은 구조 비판이어야 한다”
“대중화된 페미니즘은 소비주체로서 타락했다”
라는 식의 규정을 쉽게 내린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사실상 특정 사조의 가치판단을 전체 페미니즘의 기준으로 오독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으며, 이러한 단순화는 결국 질문을 남긴다.
이 단순화는 혹시 이론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과연 페미니스트가 맞는지,
그의 젠더적 위치는 무엇이며,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맨스플레인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은 단일한 진리가 아니라, 다층적 현실과 다양한 욕망이 교차하는 거대한 사유의 장이다. 그 다양성을 존중하는 일에서부터 비평도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