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의 문제

노동자 경험을 중심으로

by 에밀리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자유시장경제 아래에서 노동자에게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월급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노동자는 일터에서 부조리를 겪어도, 그저 생계를 위해 참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가의 폭압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노조 가입률 역시 우리나라는 여전히 매우 낮습니다.


맑스는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소외의 양상을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잉여이득으로부터의 소외
(2)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3) 다른 노동자로부터의 소외
(4)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아래는 노동 현장에서 착취와 소외를 체감한 한 노동자의 일기입니다.

그는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를 보고 이 일기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일터에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런 직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정말 작은 요소 하나만 바뀌어도 노동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그만큼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데도 그조차 몇 년째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묘한 부끄러움이 들었다. 내가 입고, 쓰고, 먹고, 몸에 지니는 모든 것들이 결국 누군가의 위험하고 고된 노동 위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여전히 알리와 쿠팡을 드나든다.


나는 현재 한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알리와 쿠팡보다 베이글집의 노동환경이 ‘그나마 낫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빵을 만드는 일 또한 위험하고, 팔이 빠질 듯 고되며, 늘 위생에 신경 쓰고, 개방된 주방이라면 복장까지 관리해야 한다. 겉으로 단정해 보인다고 해서 그 노동이 가벼울 리는 없다.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다.


나는 사실 육체노동 전반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유형의 노동이 더 위험한지, 더 고된지, 그리고 어떤 직종이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를 위험에 빠뜨리는지, 잘 모른다. 그 무지가 부끄럽다. 그런 무지와 무관심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는 사실 앞에서, 부끄러움도 분노도 살아남은 자의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 한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우리가 각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부분적으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어떤 점은 ‘좀 아닌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 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에 매몰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연대했으면 한다. 그것이 남겨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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