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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Feb 28. 2024

종이책과의 이별

무기한 세계여행 준비편

나는 아날로그 인간에 가깝다.


아날로그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대표 요건에도 부합한다. 난 종이책을 사랑한다. 책장 하나씩 넘길 때의 질감부터 책을 들 때의 무게와 책을 가지고 다니는 수고로움까지 전부 사랑한다. 책갈피를 꽂는 일도 좋아하고, 최근에는 책에 필기도 할 줄 안다. 포스트잇으로 마음을 적기도 하고, 독서노트도 손으로 적는다.


서걱거리는 종이의 감촉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종이책을 볼 때 훨씬 밀도 있게 집중할 수 있다. 처분하고 기부해도 남아 있는 2,000여 권의 책은 이사 때마다 보물처럼 이고 지고 다니고 이걸로도 모자라 자꾸 책을 사재 낀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산 책은 '거의' 다 읽는다. 당연히 서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독립서점이라도 발견하면 심장이 콩닥거리기까지 한다. K가 날 위해 고심한 데이트 코스에는 언제나 작은 서점이 들어 있다. 아, 인터넷 서점 VIP 등급을 보며 히죽히죽 뿌듯해하기도 하는구나. 나열하고 보니 나, 오타쿠였네.


그런데 세계여행을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책순이에게 세계여행은 일종의 시련이자 도전이다. 금전적 문제, 나이, 사람들의 시선, 미래 계획이 문제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종이책과 이별하냔 말이다. 이건 떠나기 전부터 서서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우선 독서노트앱을 구매했다. 좋다. 이유는 단순하다. 손이 아프지 않다. 좋은 책을 한 권 읽으면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넘쳐난다. 필사 수준이다. 거기에 따르는 내 생각과 감정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걸 키보드로 샤라락 쓰니까 정말 편하더라. 대신 좋아하는 구절만큼은 복붙하지 않고 직접 타자를 친다. 나만의 별점을 매기는데 가끔 별점대끼리 모아보면 그것도 하나의 재미가 된다. 특히 별점 1-2점에 대한 이유를 읽어 보면 그렇게 신랄할 수가 없다.


독서노트앱 5 STARS. '노션'으로 옮길까.


이제 본게임에 들어가자. 휴대폰으로 이북을 보기 시작했다. 집중이 매우 어려웠다. 아무리 다크모드를 쓰고 밝기 조절을 해도 눈이 침침해지고 문장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한 문장을 몇 번씩 반복한 적도 많다. 그래도 계속 시도했다. 이북이 불편하다는 편견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없애야지. 비교적 쉬운 책을 읽었다. 독서에 속도가 붙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든든한 나의 도서관


드디어 4권째. 어느 챕터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책에 온전히 몰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나 기쁘던지. 60여 권의 이북을 읽으면서 많이 적응했다. 이제 됐다. 마지막 파티를 할 차례다. 눈의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장만한 이북리더기는 세계여행을 출발하면 사용하기로 하고, 사놓고 읽지 못했던 종이책을 맘껏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화려한 피날레처럼.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꽃가루가 듬뿍 날리는 축제의 마지막처럼 원없이 앉아서 누워서 엎드려서 종이를 마구마구 넘기는 시간을 가지고 비행기를 탔다.


본가에 맡겨놓은 내 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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