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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Mar 13. 2024

곱게 자란 한국인

밀당의 고수, 치앙마이

세계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도 세 번의 태국 여행이 있었다. 모두 4-5박짜리 단기 여행이었고, 호텔과 리조트에서 호캉스를 했다. 가끔 전철을 타고 대부분 택시를 탔다. 모든 음식이 맛있어서 내 비루한 소화력이 원망스러웠다. 제일 좋아하는 팟타이를 매일 먹었고, 미치도록 달콤한 수박과 망고에 감탄했다. 역시 태국은 사랑이야.


2019년 방콕. 0.5초 고개 빨리 돌리면 뉴욕.


이제 보니 아주 호화롭기 그지없네. 이런 약간의 경험이 있다고 첫 국가인 태국에서 지낼 짐을 꾸릴 때 전문가가 따로 없었다. 날씨가 너무 덥고 습하니 바디로션보다는 수딩젤이 좋을 거고, 여름에는 닥터지 수분크림만 한 게 없지. 묽은 제형이어서 쏙쏙 스며드니까 태국에서 쓰기 딱이야. 바디워시는 뽀득뽀득하게 씻기는 티트리 성분의 바디워시를 챙기고, 샴푸와 선크림은 성분 좋은 걸 쓰고 있으니까 하나씩 사가면 되겠다. 수질이 좋지 않다고 했으니 트리트먼트도 가져가야지. 호텔에서 보니까 그렇게 나쁘진 않던데.. 그래도 챙기자. 역시나 한국에서 쓰던 순한 트리트먼트를 챙겼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될 거야.


다 틀렸다.


수질은 좋지 않은 게 아니라 나빴다. 사실 이 부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필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필터를 쓸 수 없는 환경으로 갔을 때 굉장히 찝찝해진다. 어느 나라든 원수가 깨끗해도 수도관이 노후됐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1년 내내 필터가 떨어질 걸 걱정하며 캐리어 곳곳에 필터를 쟁여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물에 대해 어느 정도 각오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수질이 너무 나쁘면 피부가 급격히 건조해질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수질이 나쁜 게 아니라 석회수라서 그런다고 백번 양보해도 석회수의 대명사인 유럽에서 한 달을 있어 봤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여기서 핵심은 '급격히'다. 가지고 온 물컹한 제형의 바디로션, 선크림, 수분크림은 다 소용이 없었다. 세 번을 덧발라도 금세 피부가 갈라졌다. 뽀득뽀득 씻기는 게 웬 말이냐. 바디워시는 완전 무용지물이 됐다. 심지어 우린 둘 다 지성피부인데.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다. K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자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려고 한다. 트리트먼트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머리카락이 건조해져서 뻣뻣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10일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고작 세 번 다녀온 4박짜리 여행으로 태국을 다 안다고 생각했구나.


난 성분 빌런이다. 상대적으로 발림성이 뻑뻑하고 효과도 늦게 나타나는 주제에 가격은 조금 더 비싸지만 언제나 순한 성분을 택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분명 유효한 선택이었는데.. 이제 그딴 게 어딨어. 급해. 짐을 늘릴 수 없는 우리는 하나를 다 써야 하나를 살 수 있다. 그러니까 푹푹 떠서 발라. 빨리 써야 다른 제품을 살 수 있다구. 이제 우리는 모두 현지 제품을 쓴다. 성분은 최대한 보려고 하지만 눈을 감을 때가 더 많다. 어찌 되었든 머리카락도, 피부도 안정을 찾았으니 됐지. 역시 현지 환경에 맞는 건 현지 제품이다.


사랑해요 왓슨스. 더 사랑해요 부츠.




이제는 공기 차례다. 훗 나는 무려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이야. 미세먼지로 단련된 사람이란 말이다. 많은 동남아 국가에서 매연이 심각한 건 알았지만 제발 지긋지긋한 미세먼지에서만 벗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국이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근데 그 수치가.. 평균적으로 보면 좀 귀여운 거다.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지. 우린 또 몰랐다. 치앙마이는 2월에 가면 안된다는 걸. 나의 좁쌀만 한 지식에 의하면 치앙마이는 화전을 하기 때문에 3-4월에 공기가 굉장히 좋지 않다고 한다. 현지인들도 도망갈 지경이라길래 그때만 피하면 되겠지 했다. 그리고 11-12월에 다녀온 이전 여행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단 말이다. 12월이나 1월이나 2월이나 별 차이 있겠어라는 뜬금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저 파-아란 하늘 사진이 잘못했다.


1월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2월이 되니 공기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수치로 보면 한국이 115, 치앙마이는 180. 저기요, 전 분명 미세먼지를 피해 온 사람인데요. 문제는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공기를 걷는데 내 옆을 썽태우가 지나간다. 진짜 오랜만에 육안으로 보는 까만 매연.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오토바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입이 텁텁한 건 애교스럽고 아침에 눈이 따가워서 잠에서 깬 적도 있다. K는 언제나 코가 막혀 있다. 참 곱다 고와, 우리 몸뚱이.


좁은 골목, 썽태우가 보인다.. 그 뒤에 산을 찾아 미세먼지에 동그라미 하세요.




첫 도시이다 보니 난이도가 낮은 곳으로 골라 왔다고 생각했지만 보기 좋게 당했다. 누군가에게는 괜히 집 떠나서 고생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근데.. 치앙마이가 사람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더라. 산책할 때 마주하는 이국적이면서 한적한 거리 분위기. 약간은 늘어진 듯 걸어 다니는 현지인 혹은 장기 여행객. 삶의 터전은 어디에서나 힘든 거지만 그래도 비교적 웃음이 많은 사람들. 무시할 수 없는 착한 물가와 그 덕에 풍요로운 꿀맛 과일, 진한 라떼. 공기가 좋지 않을지언정 햇볕이 누그러지면 바람이 솔솔 부는 오후. 언제나 그런 온도. 그 순간 갑자기 마음이 호로록 풀린다. 진짜 미쳐버려.


늦잠 자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 느릿느릿..


그래.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 있는 거지. 요물, 요물. 밀당의 고수 같으니라고. 모든 것이 비단길로 짜여있던 4박의 여행 몇 번으로 난 ‘태국’을 다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여행에는 잘못이 없다. 짧은 기간이면 어떻고, 호사스러우면 어떠한가. 전부 행복한 기억이다. 다만, 인프라 측면에서 엄청나게 발달한 곳에서 살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오만한 판단을 해버리거나 며칠 간의 호캉스로 너무 좋아서 천국의 도시로 만들어 버리는, 왜 가지 않냐고 여행을 강요하는 마음을 경계하려고 한다. 안다, 어쩌면 기억의 왜곡 또한 여행의 묘미라는 것을. 여행이란 단편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그렇기에 예쁜 힐링의 도시로만 기억하거나 타국을 다녀오니 우리나라가 최고네하는 감정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조금씩 조금씩 편협해지려는 내 시각을 붙들고 열심히 스트레칭시키고 싶은 것이다. 의도적으로 부지런하게.


이 나라의 11월은 이렇고, 5월은 이렇구나. 여름은 이렇고 겨울은 또 다르네. 이래서 이걸 먹는구나. 왜 그런 단어를 쓰는지 알겠다. 이런 걸 직접 경험하고 싶다. 내가 했던 한 주먹거리되는 경험으로 그 도시와 사람, 문화를 섣불리 평가하지 않고, 또 그걸 토대로 친구에게 추천 또는 비추천하며 다 아는 듯 말하는 걸 조심하고 싶다. 한 도시를 오랜 시간 들여다 보고 최대한 다양한 모습으로 그곳을 기억하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떠나왔다. 다음에는 10월의 치앙마이를, 그래서 또 달리 보이는 치앙마이를 경험할 수 있겠지. 기대된다.


밀당의 고수,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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