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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이불 Mar 05. 2024

출입국 도장을 잘못 받다.

프로긴장러가 세계여행을 하다니

그날 아침은 유난히 여유로웠다. 호텔 앞 카페에서 살랑살랑 바람을 맞으며 브런치를 먹고 맛있는 커피까지 마셨다. 아 행복이란. 이러면서.


우리는 태국에서 무비자 기간인 90일을 꽉꽉 채워서 체류한다. 이와 관련해서 태국관광청에 문의할 내용이 있다며 여권을 꺼낸 K가 내 여권에 찍힌 출입국 도장에 체류기간이 1개월로 적힌 걸 발견했다. 이미 4월까지 숙소를 다 예약했는데 2월 4일에 나가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주태국대사관(영사)에 문의하니 '이민국'에 가보라고 한다. 검색해 보니 공항 옆에 이민국이 있었고, 다행히 치앙마이는 도심과 가까운 거리에 공항이 있다. 이민국은 4시 반까지 운영하고, 지금은 3시. 기본 2시간은 대기해야 한다는데 마음이 너무 급해서 무작정 그랩을 불렀다.



그렇다. 썽태우가 왔다. 왜 하필 평소에 타지도 않는 썽태우를 부른 건지. 너무 당황해서 아무 거나 누른 모양이다. 퇴근시간도 아닌데 유난히 막히는 도로에서 매연을 맞으며 공항으로 갔다. 심지어 이민국은 공항 바로 옆에 있지도 않았다. 3시가 넘었지만 부글부글 끓는 아스팔트를 따라 이민국을 찾아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안내창구로 가니 여기가 아니라 공항 내 이미그레이션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래.. 가면 되지.. 공항은 24시니까 오히려 급할 것 없잖아..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이미그레이션에 설명을 하자 여권을 가지고 가서 한참을 있더니 2층으로 올라가면 우리랑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해결해 줄 거라고 한다.


계속해서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무작정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다른 나라에 나갔다 와야 하나. 장기 비자 신청은 어떻게 하는 거지. 별 생각을 다했다. 타국의 관공서 직원을 대하는 건 떨리는 일이다. 병원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잘못한 건 없지만 난 외국인 신분이고, 지금 내가 다루고 있는 건 비자 문제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어떤 오해가 있었든 비자 관련해서 불법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원래 오해라는 건 간과하면 금세 몸집이 불어나 있기 마련이니까.


2층으로 올라가서 두리번거리는데 말 그대로 똑같은 유니폰을 입은 남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Oh, many many. wait."


눈물 날 뻔했다. 매니매니라니. 이런 경우가 많은가 보다. 마침 중국여행객이 남자 직원으로부터 수정된 여권을 받아 가는 길이었다. 별 거 아니었어. 아니야. 호들갑 떨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는 선량한 여행자인데 태국이 좋아서 90일을 채우려는 것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렸다. 몇 분 후, 90일로 체류기간이 수정된 여권을 받았다.


커쿤카. 커쿤카 베리 머치ㅠㅠ


난 유독 이런 긴장상황을 잘 다루지 못한다. '난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하려는 의도를 가진 적도 없고, 이미그레이션에서 실수한 건데 뭐. 알아봐야겠지만 어떻게든 해주겠지.' 이런 편안한 의식의 흐름을 택하는 대신 '이미그레이션에서 실수했지만 배째라 하면 난 외국인인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럼 다른 국가에 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90일을 새로 받을 수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돈은 얼마나 깨지려나. 아니면 장기 비자 신청은 어떻게 하는 거지. 설마 면담 같은 걸 하진 않겠지. 한국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데 90일 무비자를 몰랐을 리 없잖아. 근데 왜 나만 1개월 도장이야.'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택한다. 사람은 변수가 생기면 당황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K도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도 세계여행은 처음이고, 아무리 검색해도 이런 상황이 많지 않다 보니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무의식적으로 점차 자신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쪽으로 생각이 움직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실수한 곳에서 해결해 주겠지. 만약 여기 시스템이 이상해서 해결 못하겠다고 하면 장기 비자 신청하면 되지. 아예 나가라고 하면? 나가면 되지. 그냥 4월까지 숙소비만 아까워지는 거야. 이러려고 저금하는 거지. 다칠 일은 없어. 이렇게 생각이 바뀐다. 물론 옆에서 내가 너무 긴장하니까 더 빨리 이성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K는 원래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평소에 나는 오히려 차분하고 긍정적인 사람에 가깝다. 그런데 갑자기 불안감이 확 치솟을 때가 있다. 이게 바로 내가 내 자신과 해결하고 싶은 부분이다. 세계여행은 변수의 연속일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너무나 갈망하고 떠나온 터라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 속에서만 움직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외국인 신분으로 여기저기 탐험하고 산다는 것. 세부계획 속에 나를 맞추지 않고 산다는 것. 다시 말해 그건 변수와 함께 사는 일이 것이다. 그 변수는 당황과 걱정을 동반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놀라움과 예상치 못한 기쁨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을 택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글을 쓰고, K와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처음 겪는 문화, 사람, 시스템에 계속 노출될 것이고, 마음 편히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을 외치다가도 갑자기 장기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럼 과하게 당황하지 말자고. 긴장은 가져가되 그 정도가 지나쳐 내 스스로 나를 스트레스로 몰아넣지 말자고. 그런 건 이미 한국에서 다 해본 거라고.




비자 소동 후 두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 또 몇 가지 일이 생겼다. 비행기가 취소 됐다고나 할까. 내가 택한 삶의 형태가 나에게 좋은 연습 기회를 주는구나. 하하.


90일 도장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파티를 하겠다며 야심 차게 외친 나는 치킨볶음밥을 시켜 먹고 다음날까지 그대로 뻗어버렸다ㅋㅋㅋㅋ


우리 세계여행의 시작,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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