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함께한 영화 한 편이 있다. 런던의 ‘노팅힐’이라는 곳을 무대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이는 사실 바로 전 세대를 아우르던 배우인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 주연의 작품 [로마의 휴일]의 번안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개작답게, 더욱 극적으로 마무리된 결말과 익숙한 선율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팬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영화의 촬영지를 방문하곤 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긍정적인 재생산은 모종의 신화를 창조하고, 어떤 장소들은 세대를 거듭하고도 잘 보존되어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아침에도 저렇게 관광객 두 명이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노팅힐]도 이제는 십 수년이 훌쩍 넘어 어느새 올드 무비가 되었지만 길을 따라 포토벨로 마켓에 도착하자, 실연당한 휴 그랜트가 이곳을 걷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빌 위더스의 독특한 음색을 따라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떼던 주인공의 어깨 위로 낙엽이 떨어지다가, 눈발이 날리는 듯하더니, 이내 봄이 되는 시퀀스. 구십 년대 할리우드 로맨스물 다운 전형적인 쉬어가기였지만, 그 독특한 아날로그적 연출이 오히려 빛을 발했던 이유라면, 아마도 동네가 주는 특유의 아기자기한 정서 때문 아니었을까.
반질반질한 황동 손잡이를 밀며 서점 문을 밀었다. 무거운 나무문이 열리며 종이 내음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는데, 이미 번안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