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는 아직 희뿌연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이었다. 이제 막 영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른 나라들을 향해 출발하는 순간이었는데, 유로스타라는 열차 편을 이용하기 위해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온 것이다. 아침 특유의 푸른빛 대기가 적 벽돌을 감싸고 있어, 미들랜드 그랜드 호텔의 모습은 사뭇 어느 역사 속 고성과도 같아 보였다. 수많은 창문과 첨탑이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더욱 그러하였다. 이 건물도 천팔백칠십육 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그런 감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랄까. 큰 문을 통해 역사에 들어서니 이십여 미터도 훌쩍 넘는 두 연인상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전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시작되고, 또 거꾸로 종착지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고 끝을 맺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이야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근처의 카페를 찾아 햄이 끼워진 프랑스식 빵과 작은 커피를 구입하였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배를 조금 채워야 할 터였다. 너무 배가 골아도 총기를 잃는다.
곧 기차에 올랐다. 이제 곧 출발하려는지, 문이 닫히고 덜컹이기 시작했다. 옆 좌석의 어린아이들은 어느새 잠들었고, 반대편의 연인들은 서로 음악을 나눠 듣고 있었다. 이내 검어진 창문에 기차역사 내부가 잔상으로 떠올랐다. 동상 앞 공중에 매달려 있던 핑크빛 네온사인이었다.
[I want my time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