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까까머리 학창 시절'(3편)을 읽고 오시면 맥락 이해가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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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을 머금은 바람이 청풍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바삐 올라가는 청풍의 발걸음이 나비가 바람을 타듯 가볍다.
갑자기 눈이 부셨다. 어느새 저기 멀리 선화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포니 테일 머리를 하고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서 네모나고 커다란 돌화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다리를 댕글댕글 흔든다. 주말이라 사람들로 북새통인데 청풍의 눈에는 유독 선화만이 꽉 들어찼다.
'그녀도 나처럼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걸까.'
청풍이 선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선화야! 나보다 먼저 왔네? 미안."
"오빠!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예요? 안국역 쪽에서 오는 줄 알고 목 빼고 기다렸는데, 호호."
선화가 허리를 꺾고 까르르 웃자 포니 테일이 봄비에 젖은 풀잎처럼 찰랑거렸다.
"갈까?"
"가요, 우리. 그런데 이게 얼마나 완벽한 데이트예요.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을 딱 찍자 오빠가 여기 근처의 김치찌개 맛집을 찾아냈으니 말이에요, 호호."
데이트라는 말에 청풍은 또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꾸몄다.
"어묵을 넣고 찌개를 끓이는데 정말 맛집이야. 수 십 년째 간판도 없이 장사하는 곳이라고."
선화는 식당에서 연신 깔깔깔 웃더니, 미술관에서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청풍이 미술관을 나서며 말했다.
"정독도서관에 가볼까? 벚꽃이 만개했을 텐데."
"좋아요, 우리."
선화가 발을 한번 통통 구르더니 청풍의 팔짱을 끼었다.
정독도서관 앞마당은 벚꽃의 분홍물결이 해일처럼 넘실거렸다.
"근데, 오빠. 벚꽃은 왜 마음을 들뜨게 할까요?"
벚꽃 잎이 바람을 타고 선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순간 청풍은 릴케의 시를 떠올렸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시 속의 소녀와 같이 선화는 생기발랄했다.
선화가 땅 위에 떨어진 꽃잎 몇 장을 주워 모으더니 청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 저기 저 멀리 산 좀 봐봐요. 수려한 산 꼭대기 곡선이 마치 신이 붓으로 그려낸 것 같지 않나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겠어요?"
청풍은 가슴이 쿵하고 떨어져 내렸다.
인연이 숙명처럼 찾아왔다.
"아참, 오빠! 제이름 '화'는 '꽃 화'예요. 착할 선, 꽃 화."
그녀가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디선가 엘가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청풍과 선화가 떠나간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에 K신문의 베테랑 기자 박현무가 나타났다. 굵은 뿔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이 급했다. 고서화 전문가인 고봉수 선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며칠 전 박현무는 행연도(行然圖) 영인본을 구해 선생께 자문을 부탁해 놓은 터였다.
'행연도는 왜 광휘와 짝이었을까?'
조선의 명검 광휘의 주인인 천재 여검객 박서린이 목숨처럼 아꼈다는 그림. 문무에 통달했던 조선시대 도가의 큰 어른 연담(煙潭) 이운(李雲)이 그렸다.
행연도(行然圖).
깊은 산 빼곡한 소나무숲 속 바위에 묘령의 여검객이 걸터앉아 무릎에 검 한 자루를 올려놓은 채 계곡물을 내려다본다. 연담은 정갈한 필체로 '인생은 구름과 물처럼 흐른다(人生如行雲流水)'고 발문을 적었다.
십팔기 초절정 고수 3인방으로부터 지금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가(武家)의 일'을 파헤치도록 의뢰받자, 박현무는 인사동 화랑 주인 김성환을 먼저 찾아갔다. 박서린이 병환으로 세상을 뜬 뒤에 남편 이치로가 입양한 세 명의 아들 중 큰 아들이다.
김성환은 이치로가 생전에 아들들에게 해주었던 말을 전했다.
"어머니는 광휘를 뽑아 들고 검법을 수련하기 앞서 항상 행연도 앞에서 정좌를 하고 명상을 하셨다고 했어요."
"명상을요?"
"네, 어머니가 검법을 수련하는 시간보다 명상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그림에 대해 달리 하신 말씀이 더 있나요?"
"어머니는 행연도를 다시 찾고 나서 그림이 위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아셨다고 했어요."
박서린은 생활고에 시달린 통에 행연도를 인사동 화랑가에서 헐값에 팔았다가 다시 되샀었다.
박현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혹시 행연도를 보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광휘와 함께 목숨처럼 아끼셨던 그림이라..."
그런 김성환이 한참을 고민한 끝에 행연도 영인본을 찾아다가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아마도 일전에 박현무가 십팔기 고수 최철환을 대동하고 나타나 일본 이천일류 무사 패거리를 쫓아 보낸 데 대한 보답인듯 싶었다.
"아버지가 직접 그린 영인본입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신다면서..."
'만약의 경우라? 광휘도 가짜 광휘를 만들었는데, 행연도 역시 영인본을 만들어 향후 벌어질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단 말인가? 도대체 이들 명검과 명화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타고난 기자 박현무는 작가 황석영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절창은 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무가의 일이 내 평생의 절창이 될 수도... 아니, 한국 무가의 절창이 될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