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주말 저녁 신촌 십팔기 도장의 분위기는 자못 엄숙했다. 포가권 최철환, 장창(長槍) 추무영, 발차기 박보천 세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티테이블 위의 검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이때 P신문사의 선임기자 박현무가 도장문을 열고 시끌벅적하게 들어섰다.
"아니, 이 사람들아, 초절정 고수면 다냐 말이야. 나 같은 하수는 주말까지 막 불러내도 된다고 누가 그러던가, 응?"
사실 박현무는 이미 십여 년 전에 일당백의 경지를 넘어선 최, 추, 박 트리오가 그들 모임에 자신을 종종 끼워주는 게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박현무는 트리오와 나이만 같았지 무예로 치자면 태양과 반딧불이만큼이나 격차가 컸다.
딴에는 박현무가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채고 농담을 던진 것이다. 그러다 테이블 위의 검보를 보고는 얼어붙는다. 종로경찰서장 방에서 최철환이 펴 보였던 유한 선생의 검보였다.
박현무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 왜 나를 부른 건가?"
최철환이 말을 받았다.
"검보를 펼쳐보게."
"펼쳐 보라고?"
앞서 최철환은 종로경찰서에 검보를 들고 가서는 인사동 살인사건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검 광휘(光輝) 페이지만 공개했었다. 검보는 총 세 자루 조선 최고의 명검에 관한 것이지만 "무가(武家)의 일"이라며 나머지 두 자루 검에 관해서는 한사코 함구했던 것이다.
박현무가 의자를 끌어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았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고쳐 쓰고 검보 첫 장을 넘겼는데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검보는 유한 선생이 세 자루 명검을 지은 이유를 담은 발문, 빛처럼 빠른 검 광휘(光輝), 정(靜) 속에 동(動)을 가둔 검 담월(淡月), 하늘의 끝에 이른 용의 검 항룡(亢龍) 순서로 기술돼 있다.
특이한 것은 유독 항룡에 대해서만 '천지 만물의 근원적 힘을 품은 소요유 초식에 탄복해 내 일생의 마지막 검 항룡(亢龍)을 짓기로 했다'고 밝히고, 소요유 초식을 소상히 풀어 적었다.
'항룡, 항룡이라니?'
박현무는 마치 넋이 나간 듯했다.
최철환이 침묵을 깼다.
"천재 여검객 박서린의 검 광휘에 대해서는 나와 자네가 아는 것이 같네."
"용의 검 '항룡'은 뭔가?"
"그건..."
"자네들이 말한 십팔기 문하의 큰 스승 항룡 선생님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건 우리도 모르네. 항룡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부분이 없으니까."
"검보는 어떻게 구한 건가?"
"꼭 십 년 전 항룡 선생님이 우리 셋을 모아놓고 검보를 내려 주셨어."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나?"
"아무 말씀 없으셨어. '이제는 너희들이 간수해라' 하시고는 빙그레 웃으셨을 뿐."
"그럼, 항룡 선생님이 종적을 감추신 것도 이 검보를 내놓으신 직후였나?"
"맞아. 그 뒤로는 우리도 선생님을 뵙지 못했고."
박현무가 십팔기 도장에 온 것이 5년 전이다.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은 특출난 기자 박현무가 스포츠부로 자원해 옮겨온 후였다. 그동안 무신 항룡 선생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십팔기 절정고수 삼인방이 항룡유회 초식에 대해 논하는 것도 여러 차례 들었었다.
박현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불렀나?"
최철환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일이 벌어지고 있네."
"일이라니? 자네들이 말하는 무가의 일 말인가?"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나? 무학(武學)으로 치자면 철환 자네가 한중일을 통틀어 최고의 석학이고, 무영과 보천 자네들 역시 타고난 고수들인데, 나까짓 게 무슨 소용이 된다고?"
"자네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자 아닌가. 또 무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익히 알고 있고. 이 일을 파헤치는 데 자네가 최적임자야. 물론 우리 셋이 발 벗고 도울테고."
박현무는 한국기자대상을 여러 차례 받은 베테랑 기자다. 다독으로 쌓은 식견에다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 사회 곳곳에 구축해 놓은 폭넓은 네트워크까지. 여검객 박서린 비화를 캐낸 것도 박현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조선시대 3대 검객으로 꼽히는 정동화 도인이 창안한 문파가 태청(太淸)이네. 담월은 태청문의 검으로 알려져 있고."
"그런데?"
"태청검법을 구사하는 청년고수가 나타났어. 그는 달빛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움직였네."
"광휘에 이어 담월까지 세상에 나온다는 말인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무림계가 활동을 시작했다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네. 무엇 때문인지 지금 단계에서는 추론이 불가능하지만."
이때 추무영이 끼어들었다.
"풍이가 소요유 초식을 구사했어. 태청문 청년고수를 상대로."
"그게 가능한 이야긴가? 풍화검은 무가의 전설로만 전해 내려 오는 검법 아닌가. 무학종사 격인 자네들조차 모르는 검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유한 선생이 지은 바로 이 검보가 풍화검법 제1초식으로 소요유를 적고 있다지만 그건 1초식에 불과하고, 게다가 검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으니 말이야."
"인연이 닿았을 것으로 생각하네."
"그럼 청풍이가 소요유 초식뿐 아니라 그동안 풍화검결을 익혀왔다는 건가?"
"그건 우리도 알 수가 없네."
박현무는 알고 있다. 무술 전수는 스승과 제자 둘 만의 일이다. 그들이 밝히기를 꺼린다면 캐묻지 않는 것이 무가의 법도다.
다만, 십팔기 고수 3인방과 박현무는 모두 마음속 깊이 청풍이가 인연이 닿아 풍화검을 익혀왔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았다.
신촌의 와인바. 청풍과 선화는 이제 제법 연인같다.
"오빠, 근데 왜 금요일 밤마다 도장에서 혼자 수련하는 거예요?"
"아, 그건... 혼자 집중해서 수련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청풍이 이렇게 얼버무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선화한테만큼은 머지않아 항룡 선생님과 풍화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야 할 거 같다'고.
와인바를 나서면서 선화는 살며시 청풍의 팔짱을 꼈다. 봄비를 머금은 풀잎 같은 선화의 머릿결에서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진 청풍은 이런 감정이 아마도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