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기교...달빛 부서지다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신촌 십팔기 도장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화가 도장 문가에 그림자처럼 기대 서자 창문으로 달빛이 금가루 같이 흩어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에도 눈이 부신단 말인가. 아니, 청풍이 뿜어내는 검광 때문이었다.


풍화검결 제1초식 소요유(逍遙遊). 청풍은 눈을 감은 채로 검을 펴고 있었다. 그가 든 목검은 느림 속에 빠름을, 가공할 만한 힘 뒤에 경쾌함을 숨긴 듯했다. 마치 우주의 질서를 몸으로 받아쓰는 정교한 의식 같은 검법. 목검이 가늘게 떨 때마다 달빛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청풍이 매주 금요일 신촌 도장을 찾아 항룡 선생으로부터 풍화검을 전수받은 지 1년. 그의 검이 바야흐로 길을 찾았으니 곧 일당오십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항룡 선생은 일찍이 말했었다."검이 네 안에서 스스로 숨 쉬게 하라!".

청풍은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배어났지만 호흡은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의 입가엔 평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국의 검법이 저런 것이구나!'

KLPGA 투어 프로로 자신의 스윙을 수십만 번이나 초고속 카메라로 분석하고 교정해 온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눈으로도 청풍의 움직임은 불가사의할 뿐이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검. 청풍이 펼치는 검법에는 인위적 ‘의도’ 같은 것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골프에서 말하는 근육의 수축과 이완, 토크의 발생과 전이 같은 물리적 역학을 완전히 초월한, 이른바 무위의 극치 같았다. 마침내 선화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오빠, 청풍 오빠!”

선화가 정적을 깨뜨렸다.

"어, 선화야. 여긴 어떻게?"

"오빠가 금요일 밤이면 도장에서 수련한다고 해서 왔죠. 오빠 보러 오길 잘했어오, 호호!"

선화가 밝게 웃었다.

청풍은 그녀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오빠 혼자 수련하는 거예요?"

"어? 어, 그렇지 뭐..."

청풍이 항룡 선생의 방을 돌아다보았다. 선생은 방에서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고 있을 터였다.

'항룡 선생님한테 풍화검을 전수받은 사실을 선화한테까지 숨겨야 하나?'

청풍은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선화가 틈을 내주었다.

"수련은 언제 끝나요?"

"아, 이제 다했어. 나갈까?"

청풍은 큰 신문사의 선임기자 박현무와 갔던 와인바가 생각났다.

"와인 좋아해?"

"좋아요, 한 잔 해요."


와인바에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니콜라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청풍은 갓 스무 살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악마의 기교로 카프리스 24를 연주해 내는 유튜브 흑백 영상을 떠올렸다.


"오빠, 골프도 무술과 같은 걸까요?"

느닷없는 물음에 청풍은 당혹스러웠지만, 곧 항룡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무술과 골프는 큰 틀에서 보자면 몸을 쓰는 원리가 꼭 같다."


청풍이 와인잔을 한번 빙글 돌리더니 말했다.

"선화가, 아니 벨라 프로가 골프 레인지에서 스윙을 할 때 말이야. 그 모습은 정말이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어. 인체의 움직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신비로울 정도로. 그때 문득 무술과 골프의 움직임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


선화가 이때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오빠, 사실 저는 오랫동안 골프를 그만둘까 생각해 왔었어요." 청풍은 선화가 부상으로 투어 무대에서 은퇴했다는 박현무의 말이 떠올랐다.

"몸이 다시 안 좋아진 거야?"

"그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제가 부상을 당해서 투어에서 하차한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마음속 번뇌 때문이었어요. 제 삶에서 골프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게 돼버렸던 거죠."

"그게 무슨 뜻이야?"

"저는 골프를 시작한 뒤로 줄곧 아름다운 스윙을 추구해 왔어요. 인체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스윙 말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 스윙을 이루고 투어 무대에서 여러 번 우승을 하게 되자 오히려 골프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거죠. 골프,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사라졌어요.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허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어요."


청풍은 꿈속에서 보았던 벤 호건의 친구이자 골프 교섭가인 스탠튼의 말이 생각났다. 앞으로 골프의 세계에서 퓨어리스트(Purist)와 테크니션(Technician) 사이의 혈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선화야, 그게 '골프 테크니션'의 한계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테크니션,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껍데기뿐인 미적 아름다움."


청풍이 말을 받았다.

"파가니니 말이야. 음악계 테크니션들의 시조라고 할 수 있잖아. 바이올린의 물리적 한계를 부숴버린, 화려하고 기괴한 기교로 19세기 유럽을 경악시켰던 원조 비르투오소(Virtuoso). 그런데 '라 캄파넬라'를 들어보면 악마적 기교만 보이는 것은 아니지. 원초적 아름다움이 그 속에 들어있달까. 파가니니는 한계를 넘어서는 극한의 테크닉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진 영역의 문을 열었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신비로운 선율은 역설적이게도 그 압도적인 기교 끝에서 탄생한 거지. 그러니까 파가니니는 테크니션이자 동시에 퓨어리스트라고 나는 생각해."


선화는 생각했다. ‘파가니니가 현을 끊어낼 듯한 기교로 도달한 곳은 결국 바흐가 예비해 둔 신성한 질서의 영토였다.’


"오빠, 나 다시 골프를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선화가 한층 밝게 웃었다. 그녀의 큰 두 눈에 행복감이 묻어났다. 선화는 와인잔을 쥔 청풍의 손을 살포시 그러 쥐었다. 청풍은 심장이 하도 방망이질을 해대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