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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25화

바람 같고 꽃 같은 무위(無爲)의 기예

by 무림고수 K

전편인 <무예를 겨루는 데 말이 필요 없었다>를 먼저 읽으시길 강추드립니다^^



먼 훗날 '조선제일검'으로 만백성의 칭송을 한 몸에 받게 되는 이천일이 경기 포천 명성산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나이 열다섯 무렵이었다.


조선 중기 잦은 외란과 깨어있는 자들의 징비의 시대, 이름난 큰 선비였던 조부가 앞장서 가산을 팔아 궁핍한 백성들에게 내놓고 스스로는 명성산 자락에서 화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였다. 이에 천일은 조부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위한 사상을 세우고 검을 연마하는 데 정진한다. 다만 글월이야 조부의 가르침이 워낙 뚜렷하였으나, 검에 관해서는 무릇 의지할 곳이 없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던 어느 초가을 날이었다. 천일이 산비탈 억새밭에서 제멋대로 깎은 목검을 들고 이리저리 찌르고 베고 휘두르던 때였다. 푸른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 칼을 찬 칠 척 장신의 중년인이 억새밭을 지나가다가 이 꼴을 한참을 지켜보았다. 보아하니 그 재주가 정녕 비상하였다.


"검을 연마한 지 오래되었더냐?"

"아니옵니다. 고작 채 일 년이 아니 되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더냐?"

"가르침을 받은 바 없습니다. 다만, 한양에서 보았던 무인들의 칼 휘두르는 모습을 흉내 내 스스로 익혀왔을 뿐이옵니다."

"이 산중에서라면 화전을 일구면 족하지 달리 검을 익힐 이유가 무엇인고?"

"후일 백성과 세상을 위해 검을 들고자 함입니다."

"그런 일에 검이 소용이 있더냐? 글월을 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글과 검은 각기 소용이 다릅니다. 글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검이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무인이 천일에게 본국검을 가르친다. 검을 쥐는 법, 바르게 서는 법, 상대에게 다가서고 물러나는 법, 검을 찌르고 베고 휘둘러 막는 법 등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내가 무술 교관으로 오래 일하였으나 너와 같이 검을 빨리 익히는 아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나. 앞으로 수개월만 더 검을 수련하면 능히 승냥이 떼를 상대할 수 있고, 일 년이 지나면 홀로 범 여러 마리와 맞서도 물러설 일이 없을 것이다."


무인이 떠나간 뒤 천일은 검 수련에 용맹정진했다. 억새밭에서 검술을 연마할 때면, 언제 달이 차고 기우는지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하늘 아래 짝이 없을 만큼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천일은 본국검 수련 1년 만에 검법이 자못 또 다른 경지로 나아가기에 이르렀다.


이 때는 목검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저 땅바닥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면 족했다. 하루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어 큰 원을 반복해 그리는데 낙엽들이 그 검기를 따라 올라와 허공을 맴도는 것이 아닌가. 이에 천일이 일검을 쳐내니 낙엽들이 마치 표창처럼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천일이 다시 나뭇가지를 가만히 내려 잡자 낙엽들이 일제히 땅 위로 잔잔히 가라앉았다.


천일이 이를 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억새밭에서 어슬렁어슬렁 노닐다가 검 초식을 만들었구나. 잎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큰 붕새조차도 구만 리 하늘을 난 뒤에는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 법. 우리네 삶과 죽음도 꼭 그러하다. 이 같은 크고 작은 만물의 변화를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지극한 유연함, 이것이야말로 검의 궁극적인 경지를 여는 근원적 힘일 것이다.'


공맹은 물론 노장 역시 즐겨 읽은 천일은 이 초식을 '소요유(逍遙遊)'라 이름 지었다. 이때 이미 홀로 오백명의 무사를 상대할 검술 경지에 오른 천일은 삼 년을 두고 소요유 초식 하나만을 연마하니 곧 일당천을 넘어 아득한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이때 왕실에서 사악한 귀신을 쫓고 재앙을 물리치는 사인검을 짓다가 물러나 강호에 나온 말년의 유한 선생이 천일을 찾아왔다. 본국검을 가르친 무인의 이야기를 듣고 둘도 없이 빼어나다는 청년검객을 찾아온 것이다. 청년 천일이 이룬 성취는 실로 놀라웠다.


"검술에 가히 이러한 경지가 있었더냐. 너에게 검이란 무엇이냐?"

"검은 그저 검일 뿐입니다."

"첨언해 보거라."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곧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검이 그저 검의 생을 살게 하는 무위의 검술을 꿈꿉니다."

"내 너를 위한 검을 지어서 다시 찾을 것이니라."


다시 3년이 지나자 천일은 검리에 통달했다. 검의 이치는 하나라, 곧 여러 초식을 만들었다.


강유겸전(剛柔兼全), 강하되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곧 강해진다. 무영무형(無影無形), 검이 빠르면 그림자도 형태도 사라진다. 검출여룡(劍出如龍), 검을 뽑으니 용이 승천한다. 검광만장(劍光萬丈), 검광이 만 길에 이른다. 장풍파천(長風破川), 거센 바람이 강물을 가른다. 운산무소(雲散霧消), 구름이 흩어지고 안개가 사라진다.


여기에 이르자 천일은 일초식인 소요유를 거꾸로 시전했다. 검을 빠르고 묵중하게 찔러 들어갔다가 큰 원을 반복해 그리며 물러섰다. 이름하여 항룡유회(亢龍有悔) 초식. 천일은 검을 펴는 데 더 이상의 검초가 필요치 않았다.




십팔기 고수 3인방이 신촌의 도장 티테이블에 둘러앉아있다. 테이블 위에는 유한 선생의 검보가 놓여 있다. 포가권의 고수 최철환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고수 3인방이 마음속 깊이 새긴 검.


항룡(亢龍). 무릇 하늘의 끝에 이른 용의 검이다. 거친 눈꽃무늬가 깃들고 먹빛 광택이 감도는 검을 지으니 그 형상이 썩은 매화나무 가지와 같구나. 검날이 없고, 하물며 검집도 없다. 대저 검이란 무엇인가. 검은 그저 검일 뿐이로구나. 바람과 같고 꽃과 같은 검, 풍화검결을 깨우친 자만이 항룡을 뽑아들 것이로다. 일생의 마지막 10년을 모두 바쳐 마침내 이 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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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