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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22화

반백 년 후로 날아든 꿈속 계시

by 무림고수 K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그래, 너무나도 멋진 꿈이야.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라고. 원더풀!'


청풍의 가슴이 마구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울타리 안에 갇혀있던 천리마가 막 푸른 초원에 풀려난 것처럼. 그것은 흡사 십팔기 도장을 우연히 찾았다가 항룡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와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청풍은 항룡 선생이 원고지에 필기체로 휘갈겨 써 놓은 문장을 곰곰이 곱씹어 보다가 단잠에 빠져든 듯싶었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바로 다음 샷이다. (The most important shot in golf is the next one.) - 벤 호건 - '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가.


195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리비에라 컨트리클럽 골프 레인지. 구릿빛 피부, 탄탄한 근육질의 중년 골퍼가 품 넓은 바지, 타이트한 반팔 셔츠를 입고 플랫 캡을 깊게 눌러쓴 채 무심한 듯 드라이브 샷을 쳐내고 있다.


청풍은 얼마 전 골프 레인지에서 벨라의 골프스윙을 처음 보았다. LPGA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스윙이라 칭송받는 바로 그 스윙을. 숨을 멎게 만들 만큼 놀라운 그 스포츠적 매커니즘. 골프 문외한인 청풍조차 얼마나 찬탄했던가.


그러나 그런 벨라와도 이 중년인은 비교 불가로 보였다. 그의 스윙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골프볼을 쳐내겠다는 의식조차 없어 보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윙.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리듬과 템포. 그러나 부드러움 속에 강력한 힘을 숨긴 듯 하얀색 골프볼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푸른 하늘로 높이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에겐 페이드나 드로우처럼 구질을 조절해 골프볼을 쳐내는 것쯤은 그저 하늘에다 펜으로 '스스슥' 마음대로 곡선을 그리는 것만큼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인류 골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볼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벤 호건. 이 중년인은 청풍이 유튜브에서 본 바로 그 전설의 골퍼 벤 호건이 분명했다.


"역시 벤 호건이야. 그렇지?"

청풍이 고개를 돌려보니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이 만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청풍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웰웰웰(Well well well), 히어 위 고우(Here we go)."

청풍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젊은 친구가 호건과 신체 조건이 꼭 같구먼 그래. 호건 스윙을 그대로 카피해 낸다면 아주 볼만하겠어. 그간 전도 유망한 골퍼들이 그의 스윙을 따라 하려고 죽기살기로 노력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지 뭔가. 그런데 자네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 아주 타고난 몸이라고."


타고난 몸이라니.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건지 그 까닭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포가권의 최철환 등 십팔기 초절정 고수 3인방은 도장을 처음 찾아온 청풍의 몸 골격과 움직임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 뒤로 청풍이 십팔기를 착착 익혀나가는 모습을 정이 뚝뚝 떨어지는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하였으니 줄곧 금이야 옥이야 청풍을 끼고 돈 것은 당연했다.


하물며 일기당천의 항룡 선생마저도 전설의 검법 '풍화검'의 유일무이한 전인으로 청풍을 낙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항룡 선생과 청풍과 하늘만 아는 일이다. 아!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고 필히 운명이라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청풍이라고 합니다."

"청풍이라. 무슨 뜻이지?"

"조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산처럼 푸르게' 청(靑),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풍(風)입니다."

"브라보! 동양에서는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본다지. 그게 맞는다면 자네는 골프를 할 운명일 테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돌아보게. 흑진주 같은 눈을 반짝이는 동양인은 여기에 자네밖에 없다고."


"선생님도 골프 프로세요?"

"음, 골프로 먹고살고 있으니 프로라고 해야겠지. 난 잭 스탠튼일세."

"벤 호건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세요?"

"관계랄게 있겠나. 나는 그냥 호건을 존경할 뿐이네."

"그가 이룬 업적 때문인가요?"

"골프 대회 우승기록도 대단하긴 하지. 특히 올핸 3개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는 ‘트리플 크라운’까지 달성했으니까."

벤 호건이 메이저인 마스터스, US오픈, 브리티시 오픈을 우승해 트리플 크라운을 한 건 1953년. 최고 전성기의 그가 골프 레인지에서 구름 관중을 뒤로하고 볼을 쳐내고 있는 것이다.


스탠튼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난 호건이 보여준 골프에 대한 열정을 더 존경한다네."

"열정이라면?"

"알다시피 그는 원래 골프 캐디였어. 그런데 밤낮없이 골프 연습에 몰두했지. 골프를 치기 위해 걷고, 골프를 치기 위해 말하고, 골프를 치기 위해 생각하고, 골프를 치기 위해 살았어. 그렇게 자기만의 스윙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 어때, 지금 그의 골프는 누가 뭐래도 세계 최고 아닌가. 세상은 호건이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네. 그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 왔는지."


"역사가 평가할 불세출의 영웅이죠. 벤 호건 선생님의 골프 스윙을 현대 골프의 시작이라고 말하니까요."


"호건이 쓴 책이 곧 나올 거야. 그의 골프 기술과 철학이 총망라될 책이지."

벤 호건의 불후의 명저 '파이브 레슨즈'가 나온 건 1957년이다. 청풍은 그로부터 60년도 훨씬 더 지난 2025년에 파이브 레슨즈를 읽다가 벤 호건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 때다. 그날의 골프 연습을 마친 벤 호건이 청풍과 잭 스탠튼 앞으로 다가왔다.


"헤이, 잭. 책은 잘 돼가는가?"

"벤, 자네의 스윙은 끊임없이 발전하는구먼. 정말이지 대단해."

벤 호건과 잭 스탠튼은 격의 없는 친구사이 같았다.

"잭, 나는 골프계의 현자인 자네의 책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고. 잊지 말라고, 하하"


그리고 나자 벤 호건은 청풍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벤 호건은 항룡 선생님처럼 따뜻했다. 청풍은 자기도 모르게 폴더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청풍이라고 합니다."

"행운을 비네!"

청풍은 골프 레인지를 떠나는 벤 호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 석양이 거인의 어깨 위로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타임 투 고 홈(Time to go home)."

스탠튼이 말했다.

'곧 꿈에서 깰지도 몰라.'

청풍은 골프계의 현자 스탠튼에게 무어라도 빨리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지금으로부터 70년쯤 뒤엔 골프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느닷없는 질문이었는데도 스탠튼은 미리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거침없이 대답했다.

"골프는 물론 크게 발전해 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테크니션과 퓨어리스트 간의 무시무시한 결전이 펼쳐지고 있을 테고."

예기치 못한 답변에 청풍은 귀가 솔깃했다. 테크니션(technician)과 퓨어리스트(purist)라.

"골프의 세계에서 테크니션이라면?"

"이 친구야, 그건 한 두 마디로 설명이 어려워요. 자네 음악이나 미술 좋아하나?"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음악을 듣고 그림 보는 걸 좋아 합니다."

"굿! 테크니션은 니콜로 파가니니 같은 사람이야.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운 것 같은 극한의 기교를 가진 자!"

청풍은 숨이 멎을 듯했다.

"퓨어리스트는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눈부신 기교보다 내면의 질서와 조화, 음악의 뼈대인 구조와 형식을 중시하는 사람이야."

"테크니션과 퓨어리스트 중에 누가 더 훌륭한가요?"

이때 청풍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돌아보니 그의 작은 원룸 책상 앞. 청풍은 책상 위에 놓인 벤 호건의 어록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화려한 골프를 즐기지 않는다. 골프 그 자체를 좋아할 뿐. (I don’t like the glamour, I just like the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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