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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20화

명검은 주인을 찾아갈 것이니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아까 말이야... 자네가 광휘를 뽑았을 때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긴 칼과 짧은 칼 두 자루를 쓰는 이천일류(二天一流)의 일본 검객과 그 패거리를 쫓아 보낸 직후 다시 화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박현무가 최철환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박현무는 확신에 찬 눈빛이다.


'주인을 찾으면 검은 마땅히 빛을 뿜으리라.'

조선시대 3대 명검을 지은 유한 선생. 선생은 검보를 남겨 명검 중 하나인 광휘에 대해 그렇게 적었다. 최철환이 종로경찰서장 방에서 그 검보를 펴 보였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적절한 지 모르겠지만."

박현무가 김성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김성환은 여전히 주먹을 쥔 채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일본 검객은 필시 연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한 선생이 검보에서 말씀하신 꼭 그대로 아닌가."

최철환이 바로 광휘의 주인이라고 박현무가 돌려서 말한 것이다.


"광휘는 조선의 명검이네. 나는 그저 조선검법 중 한 초식을 펼쳤을 뿐이야."

최철환이 잔잔한 어조로 답하자, 박현무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사람아, 그럼 청풍이가 조선검법을 펼쳤다고 광휘가 그처럼 반응을 했겠느냔 말이야."

최철환이 담담하게 말했다.

"명검은 운명처럼 주인을 찾아가는 법이네."


박현무는 최철환이 더 이상 이야기할 거 같지 않은 눈치를 보이자 '휴'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까 그놈들을 그냥 보낸 게 아쉬울 뿐이네."

"그자들은 그냥 하수인일 뿐이야. 검을 쓰던 자도 검을 펼칠 때 살의가 없었네."


이때 김성환이 끼어들었다.

"3년 전 홀로 집으로 쳐들어온 자는 이천일류의 초절정 고수였습니다. 우리 삼 형제가 모두 나섰는데도 그자는 짧은 칼 한 자루만 뽑아 대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박현무가 말을 받았다.

"분명 광휘를 노리고 왔을 테고."


"그자가 짧은 칼을 뽑았을 때 우리는 그의 적수가 못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습니다. 발검 실력도 대단했지만 검을 뽑아 서 있는 자세에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단 몇 초식 만에 막내가 어깨에 칼을 맞고 쓰려졌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뒤늦게 귀가했고 그자와 일전을 벌였습니다."


김성환이 말을 이었다.


당시 이천일류 고수는 아버지를 보자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치로 사형, 오랜만이오. 한국검법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확인할 게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소."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 오기 전에 도쿄의 유명한 이천일류 문파에서 검을 수련했던 것이다.


"검을 좇아 온 건가?"

"진짜 검을 찾으러 온 것이오."

"한 가지만 약속해 다오. 나와의 대결에서 진다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사형이 살아 있는 한 다시 찾지는 않을 것이오."


그자가 긴 칼을 '핑' 하고 뽑아 들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광휘였다.

"조선의 검법 천광이 얼마나 대단한지 봅시다."

역시도 70대에 접어든 나이로 보였는데 검 두 자루를 들고 선 모습이 가히 일가를 이룬 고수의 풍모였다.


이천일류와 천광은 둘 다 쾌검 유파다. 누구의 검이 빠른가에 승부가 갈린다. 그러나 그 빠름은 단순한 물리적 속도라기보다 허와 실을 구분하는 속도다.

'천광의 감(砍)' 검법은 5개 초식만으로 이뤄졌다. 다시 5개 초식은 각기 3가지 동작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동작의 순서, 초식의 순서를 바꾸면 천광검법은 천변만화한다. 검법의 요체를 깨달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치로는 광휘에 흰 광목천을 두른 채 맞섰다.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낌새를 챘는지 상대가 돌연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격필살. 이치로는 소매를 길게 베였고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어깨에 칼을 맞은 막내아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피링~'

이치로가 청명한 소리와 함께 광휘를 뽑았다. 동시에 그의 검법이 천변만화에 들어갔다. 허와 실을 숨긴 천광의 검망에 상대는 허둥지둥할 뿐이다.

피링, 일격. 이치로의 광휘가 상대의 광휘를 3분의 1쯤 잘라냈다. 피링, 이격. 광휘가 상대의 허리를 베었다.


"헉!" 상대가 헛바람 소리와 함께 허리를 꺾더니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광휘는 조선의 검이네. 결코 일본 무사의 손에 넘겨줄 수 없다고."

이치로가 짤막하게 말했다. 상대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절망에 찬 눈빛으로 이치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 가짜 광휘가 잘린 채 남았을 뿐이다.


여기까지 듣다가 박현무가 말했다.

"아버지가 광휘의 주인인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가짜 광휘를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던 거군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난 지 몇 개월 만에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이름은 김일한. 어머니 한 사람만 바라보고 한국 사람으로 살겠다는 뜻으로 지으신 이름입니다."


"어머니가 천광검법을 아버지께 전수하신 거겠지요?"

최철환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평안도 의주의 거상이자 조선 3대 검사 중 한 분인 박정명 선생의 후손입니다. 함자는 박서린(朴緖璘). 광휘는 유한 선생이 박 선생의 쾌검을 보고 3년간 혼을 담아 지어 전달한 집안의 보검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박정명의 쾌검이 바로 '천광 검법'이고 천광은 후에 '자'와 '감' 두 유파로 나뉘었습니다."


김성환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이름으로 호칭하기를 좋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언젠가 아들 삼 형제와의 술자리 끝에 전해준 말이다.


서린은 어려서 조부께 천광을 배웠지. 그런데 검을 배운 지 5년 만에 그 기예가 조부의 수준을 뛰어넘은 거야. 조부는 "나는 선조가 남긴 검법을 고작 4할 정도 깨우쳤을 뿐이다. 너는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면 7할까지는 깨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서린은 정말 타고난 검사였어. 그녀가 광휘를 뽑아 들면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지. 그야말로 찬연한 빛이 뿜어져 나왔어. 다섯 칸짜리 기와집 뜰이 그 빛으로 가득 찼지. 수 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에 가득 달린 노란 은행잎들이 무색할 정도였어. 유한 선생의 혼이 검 주인이 가진 검기를 만나 광휘가 완성된 거야.


유한 선생은 검보 발문에 적은 바 있다.

"검의 생명은 내가 불어넣었으되, 이를 쓰는 자가 검을 완성할 것이다."


박현무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최철환은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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