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소요유(逍遙遊), 강유겸전(剛柔兼全), 무영무형(無影無形), 검출여룡(劍出如龍), 검광만장(劍光萬丈), 장풍파천(長風破川)...
항룡 선생이 풍화검 초식들을 잇따라 시전하자 목검이 만들어낸 수십 수백 개의 검화가 도장 안을 꽉 채웠는데 그것은 마치 시작도 끝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광활한 우주 그 안에서 신비로운 별들이 반짝반짝 생명을 얻어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청풍의 눈에 꼭 그렇게 비쳤다.
"풍아, 잘 보았느냐!"
마침내 선생이 목검을 내려뜨렸는데 호흡 하나 옷깃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넉넉한 풍채에 인자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할 뿐이다.
'무예의 정수를 깨치고 나면 움직임이 저와 같이 신출귀몰하구나!'
청풍은 선생의 검술 경지에 넋이 나갔다. 무신(武神). 왜 십팔기 도장의 3대 고수인 포가권 최철환, 발차기 박우현, 장창 추영환이 입을 모아 그렇게 추앙하는지 알 수 있을 듯싶었다.
청풍이 멍청하게 서 있자 선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녀석하고는. 오늘은 그만해야겠구먼. 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거라."
곧 선생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작은 방에 다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청풍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선생님, 아까 풍화검을 펼치실 때 선생님 모습은 오간데 없이 보이질 않고 오히려 수십 수백 개의 목검이 날아다니는 환영을 보았습니다. 제가 잘 못 본 건가요?"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예로부터 무예 수련을 할 때 안법(眼法)을 아주 중요시했거든. 눈동자와 눈빛을 운용하는 게 안법이야. 그러니까 무술인의 눈은 수련을 통해 민감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맑게 만들어야 하는 거지. 풍이도 이제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눈이 생겨난 거야. 안법만 놓고 따지자면 벌써 최철환과 같은 경지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고. 타고난 눈이라고 봐야지."
청풍은 알듯 모를 듯했다. 그래도 항룡 선생의 신비로운 검술을 집중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무술의 눈'이 트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선생님, 복서가 상대의 주먹을 미리 읽어 피하거나 빈틈을 찾아 뚫고 공격해 들어가는 이치,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주 일차원적인 수준으로 말하자면 그런 뜻이긴 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때가 올 거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헛헛. 아무튼 눈은 무인의 의지를 담는 창인 동시에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해."
청풍은 더 물어봤자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만 계속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항룡 선생의 책상 위에 골프책 몇 권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어, 선생님. 골프책도 보세요?"
"아주 재미있던데. 요즘 골프책에 푹 빠졌어, 허허. 골프 역사에서 불세출의 영웅들이라고 하던데. 바비 존스, 벤 호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 로리 맥길로이."
주로 문학, 역사, 철학 고전류를 즐겨 탐독하는 선생이 골프책을 본다니 의외였다.
"혹시 무술과 골프가 어떤 연관이 있나요?"
"물론, 무술과 골프는 큰 틀에서 보자면 몸을 쓰는 원리가 꼭 같거든. 게다가 무술 기예의 수준은 담력, 힘, 빠르기, 기술 등 네 가지로 판가름 나는데, 이 책들을 보자면 골프 역시도 그렇더구나."
이어 항룡 선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청풍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거라. 나도 책이나 좀 더 보다가 곧 들어갈 테니."
"선생님, 시간이 벌써 11신데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야, 어서 들어가거라. 나는 알아서 들어가면 되니까, 헛허"
도장문을 나오면서 청풍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매주 금요일밤, 항룡 선생께 몇 달째 풍화검을 배워왔지만 수련이 끝난 뒤 선생은 한사코 청풍을 먼저 귀가시킨 것이다.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청풍의 얼굴을 기분좋게 간지럽혔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그 문장을 써 놓으신 걸까.'
항룡 선생이 몽블랑 만년필로 원고지 네모칸을 무시하고 필기체로 흘려 써 놓은 문구가 청풍의 머릿속에 또렷이 떠올랐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샷은 바로 다음 샷이다. (The most important shot in golf is the next one.) - 벤 호건 -'
"오빠, 청풍 오빠. 여기 순댓국 정말 유명하거든요. 우리가 조금 일찍 와서 그렇지 점심시간에는 거의 30분 넘게 웨이팅을 해야 한다고요."
종로의 한 핫플 순댓국집. 주말 이른 시간인데도 식당엔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선화가 눈을 반짝거리며 밝게 웃었다.
"오빠, 선물."
"선물?"
청풍은 아직 선화에게 선물을 준 일이 없어서 머쓱했다.
"드라이버예요. 언젠가 오빠가 골프를 시작할 거라고 생각해서, 호호."
"아, 아직 언제 시작할지 생각 못해봤는데. 이거 벗겨봐도 돼?"
"그럼요."
청풍이 헤드커버를 벗겨내자 하얀색 드라이버 크라운 위에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파란색 하트가 보란 듯 그려져 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먹먹해 왔다. 고교시절, 도서관 하얀색 책상에 그려져 있던 손톱만 한 파란색 하트가 떠오른 것이다. 그날 가을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이 하트는 어떻게..."
"예쁘죠? 샤갈이 쓴 파란색 톤으로 제가 그려 넣었어요."
"샤갈의 파란색. 그럼 벨라도 샤갈의 연인 이름에서 따온 거야?"
"맞아요. 고교 1학년 가을에 올려다본 하늘이 샤갈 그림의 파란색을 닮았었거든요. 그때 영어이름을 벨라로 쓰겠다고 마음 먹었죠."
청풍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선화는 밝고 투명한 눈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청풍은 선화와 있으면 언제든 행복할 거 같았다.
"오빠, 여기 이 막대기 이걸 샤프트라고 하는데, 60그람대 X스펙으로 맞췄어요. 가장 딱딱한 샤프트를 만드는 브랜드 제품으로. 음, 나중에 알게 될 텐데 이 샤프트는 헤드 스피드가 110마일은 넘어야 쓸 수 있어요."
"110마일? 그게 어느 정도의 빠르기야?"
"KPGA, 그러니까 한국 남자 투어프로 평균 헤드스피드가 110마일이 조금 안될 거예요. 남자 아마추어 골퍼로 치면 최상위 1%도 아마 110마일이 안될 거 같긴 해요."
"그런데 내가 이걸 어떻게 쓸 수 있지?"
"오빠, 제가 도장에서 오빠가 대련하고 권법 연습할 때 지켜봤잖아요. 그 정도의 빠르기와 유연성, 순발력이라면 110마일 이상의 헤드스피드를 분명 낼 수 있을 거예요. 저 이래 봬도 KLPGA 2승을 거둔 투어프로예요, 호호.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얼마나 골프를 잘 칠 수 있을지."
"무술은 담력, 힘, 빠르기, 기술 이런 것을 순서대로 중요시하는데, 혹시 골프도 그래?"
"맞아요. 담력은 골프로 치자면 멘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프로의 세계에선 멘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메이저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잭 니클라우스가 '골프의 70%가 멘털'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거기에다 비거리를 내는 헤드스피드, 페이드니 드로우니 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많은 스윙 기술적 측면도 물론 중요하고요. 아마 오빠가 골프를 시작하고 나면 무술과 일맥상통하는 게 많다고 느낄 거예요. 저도 무술도장에서 오빠가 운동하는 걸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핫플답게 순댓국 맛은 기가 막혔다. 선화는 순댓국을 푼 수저에 깍두기를 올려서 먹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한 수저 준비하더니 "짠해요"하고 청풍과 소주잔을 부딪쳤다. 이대로라면 곧 골프를 배우게 될 거 같다고 청풍은 생각했다. 그날 둘은 그림전시를 보러 갔는데 선화는 전문가 못지않은 조예를 보였다. 그녀는 골프와 미술, 음악은 마치 초록색, 녹색, 연두색처럼 서로 닮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