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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16화

검법을 전수한 아버지의 원수는

by 무림고수 K

"경찰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거지. 자네가 그렇게 단서를 줬는데도 진척이 없다니 말이야. 이러다간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될 거라고 김 서장이 다시 부탁을 해왔지 뭔가."

박현무가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를 터벅터벅 걷다가 말문을 열었다.


"3년 전에 열린 사인검 전시회에 광휘(光輝)를 출품했던 소장자를 못 찾아냈단 말인가?"

최철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경찰 조사에 따르면 어느 날 미술관으로 택배가 와서 열어보니 광휘가 들어있었다는 거야. 동봉된 쪽지에는 '전시회가 끝나면 검을 택배로 보내달라'며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소장자의 호의를 감안해 미술관측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주소지로 택배를 보냈고. 그런데 경찰이 그곳을 찾아갔더니 원래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고 없었다는 거지. 광휘고 뭐고 흔적도 못찾은 거야."


"살해된 김 씨가 운영한 고미술품 화랑에서도 단서를 못 찾았다는 거지?"

"화랑은 지금 30대 아들이 운영을 하고 있더라는데. 거기서 무예서 몇 권, 사인검 몇 점, 진귀한 고서화들을 찾아내긴 했는데 경찰이 워낙에 까막눈이라 도대체가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지."


"자, 여기 이 골목으로 들어가서. 그렇지 저쪽 골목에서 좌회전하면 김 씨 화랑이 나올거야."


그 화랑에서 누군가가 불을 끄고 막 나오더니 철재 셔터를 드르륵 내렸다.

박현무가 다가가 말을 건넸다.

"말 좀 묻겠습니다."


그때다.

등을 보이고 있던 사내가 흰색 광목천으로 싼 긴 막대기를 느닷없이 휘둘러 왔다.

박현무가 펄쩍 뛰어 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한 발 늦어 허벅지에 일격을 맞았다.

'윽!'. 박현무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을 마주한 사내는 서른 중반 나이로 보였는데 안광이 마치 불이라도 뿜을 듯 형형했다.

최철환이 이내 빠른 걸음으로 사내에게 스스슥 다가섰다.


사내는 두 손으로 막대기를 움켜쥐더니 최철환의 목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려쳤다.

최철환이 어깨를 가볍게 틀어 상대의 공격을 흘려냈다.

그러자 사내가 연이은 동작으로 막대기를 매섭게 뿌려왔는데 최철환이 이번에도 오른팔을 들어 가볍게 튕겨냈다.


그때다.

돌연, 사내가 흰 광목천 안에서 무언가를 휙 뽑아 들었다.


'피리링!'

검집을 빠져나온 검이 차갑게 울었다. 희뿌연 달빛을 받은 검은 푸른 뱀처럼 빛을 뿜었다.


'광휘!'

최철환이 속으로 부르짖었다.


'핑!'

일격필살. 사내는 최철환의 목과 허리를 연이은 동작으로 베어 나갔다. 얇은 검신이 '피링 피링'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토해냈다.


'천광의 감(砍)!'

최철환이 상대의 유연한 손목, 허리의 힘으로 검을 뿌리는 기술, 내려치는 일격 뒤 곧바로 사선으로 올려치는 이격, 삼격의 연속동작을 읽어냈다.


'저자가 어찌 천광을 구사한단 말인가!'

최철환은 상대가 '천광의 감' 유파 고수로부터 검법을 배워 적어도 십 수년간 검을 부단히 연마해 왔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부르르 떨리는 검신으로 보아 그의 공력은 절정고수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십팔기 초절정 고수 최철환한테 공격이 먹혀들 리가 없다. 설령 그자가 둘도 없는 천하의 명검 광휘를 뽑아 들었다고 해도.


'팅!'

최철환이 급히 허리 벨트를 풀어 광휘를 튕겨내는 동시에 포가권을 펼쳐 사내의 가슴에 일격을 꽂아 넣었다.

최철환의 가벼운 일격에도 상대는 '억!' 하고 몇 미터쯤 날아가더니 풀썩 쓰러졌다.

광휘가 '칭' 하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자네 괜찮은가."

박현무가 꾸부정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찮으이. 그냥 허벅지를 조금 스쳐 맞았을 뿐이야."


"저 사람은 많이 다치지 않았나?"

박현무가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급소를 피해 가볍게 쳤으니 30여 분만 지나면 회복될 걸세."


최철환이 광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흰 광목 속에 든 검집에 '칭'하고 광휘를 갈무리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광휘를 가지고 있지?"

"일본 사람 아니었나요?"

땅바닥에 엎어져 가쁜 호흡을 고르고 있던 사내가 오히려 되물었다.

"무슨 말이요?"

"당신이 일본 검객이라고 생각해 검을 뽑아 공격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일본 검객?"

"아버지를 죽이려 칼 두 자루를 찬 일본인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일본인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최철환이 사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광휘를 넘겨받은 사내가 연신 콜록거리며 화랑 열쇠를 최철환에게 넘겨주었다. 곧바로 셋은 화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화랑 안을 묵묵히 들여다보는 자가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최철환과 사내의 싸움을 줄곧 지켜보던 자. 긴 칼과 짧은 칼 한 자루씩을 허리에 찬 그는 발걸음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가 일본 검객의 검에 당하셨다는 말입니까?"

박현무가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말을?"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티테이블 위에 놓인 광휘를 어루만졌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집에는 연꽃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저는 김성환이라고 합니다. 종로경찰서 의뢰로 오신 분들인가요?"

최철환이 말을 받았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주신 무술에 탄복했습니다. 아까 사용하신 무술이 포가권이겠지요?"

최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고아원에 있던 우리 삼 형제를 입양해 보살펴 주셨지요. 선생님께서는 눈이 밝아 알아보셨겠지만, 아버지는 우리 삼 형제에게 '천광의 감' 검법을 전수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자질이 평범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검술의 진의를 깨달을 수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검객 한 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긴 칼과 짧은 칼을 번갈아 번개처럼 휘두르는 이천일류(二天一流)의 고수. 그의 아버지가 광휘를 뽑아 대적했다. 30여초의 공방 끝에 일본 검객은 긴 칼이 광휘에 3분의 1쯤 잘려 나가고 허리에 칼을 맞자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 달아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소매가 길게 베이고 팔에 상처를 입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3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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