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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17화

고독한 여인이 지녔던 검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아버지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죽음을 택하셨을 겁니다."


"죽음을 택했다고요? 살해당하신 게 아니고?"

박현무가 놀라 물었다.

최철환이 낮게 탄식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황망한 것이어서 저도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선생님들께 제가 아는 대로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성환이 말을 이어갔다.

자신을 입양해 키워준 아버지와 아버지가 일평생 그토록 간절히 사랑한 어머니, 그들의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의 아버지 키무라 이치로(木村 一郎)는 1980년 서울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이치로는 그때 이미 일본 열도에서 고미술품 감정과 매매에 있어 둘째 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의 탁월한 역량을 뽐냈는데, 더 큰돈을 벌 기회를 찾아 한국행을 택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고미술품 시장이 발전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좋은 상품을 선별해 사들였다가 일본 시장으로 넘기기만 해도 최대 수 십 배까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이치로는 때때로 보물급 고미술품들을 사들여 일본으로 밀반출했는데 그중 일부가 야쿠자 세력한테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쿠자단으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조선시대 장인이 빚은 명검 '광휘'를 찾아라."

서울 인사동 고미술품가를 수소문하다 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전언과 함께 착수금 조의 거금이 전달됐다.


이치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쿠자의 착수금을 받게 된 것인데, 일단 그것으로 결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든 꼴이 됐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몇 달간 인사동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 화랑에서 "검술에 조예가 깊은 여성 무술인이 한 달에 한 번씩 인사동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항시 보검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더라"는 말을 들었다.


이치로는 여성 검객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흰 광목천에 싼 무언가를 등에 두른 그녀를. 소박한 옷차림에 흑단 같은 긴 머리, 가냘픈 체구의 뒷모습은 때마침 불어온 가을바람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이치로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인사동 거리를 막 빠져나가서 버스를 타려고 얼굴을 돌렸을 때 이치로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눈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지만 무언지 모를 고독을 담고 있었다. 고독까지 아름답게 비추는 눈. 그 순간 이치로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운명임을 직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처음 만난 그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평생 그날 어머니의 눈빛을 떠올리며 사셨다면서."


"어머니가 바로 이 검의 주인이셨군요."

박무현가 티테이블 위에 놓인 광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6.25 동란에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의 손에 자랐다고 합니다. 조부는 원래 평안도 의주의 거상 집안의 장손이었다고 하고요. 그런데 일가가 남한으로 넘어오다가 폭격에 참변을 당해 조부와 어머니만 살아남으셨다고."


김성환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어머니의 조부는 경기도 양평 용문사를 지키는 천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마음에 두고 인근에 다섯 칸짜리 기와집을 지으셨습니다. 그 집에서 어머니가 평생을 사신 거죠."


박현무가 물었다.

"그럼 양친이 결혼하신 건 언제쯤?"

"연로하셨던 조부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홀로 그 집을 지키고 사셨는데..."


이때 최철환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제지하고 나섰다. 통창을 통해 화랑 밖을 내다보니 언제 왔는지 건장한 체구의 남성 10여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10시가 넘은 늦은 밤.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화랑을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이때 김성환이 광휘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은 불이라도 토해낼 듯 이글거렸고, 검을 잡은 손은 부

르르 떨고 있었다.


10여 명의 사내들 뒤로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차고 복면을 한 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골목길에 몸을 숨기고 최철환과 김성환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던 그자가 응원군을 대동해 돌아온 것이다.


최철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사내들이 긴장한 듯 저마다 싸울 태세를 갖췄다. 최철환의 공력에 대해 익히 이야기를 듣고 온 듯했다.


최철환이 말했다.

"유도와 가라테, 이천일류(二天一流)를 수련한 자들이오."


"뭣 때문에 저러는 거지? 혹시 광휘를 노리고 온 거 아닐까?"

박현무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말했다.


"내가 나가 볼 테니 두 분은 안에 있었으면 하오."

십팔기 초절정 고수 최철환이 일당백의 무예경지에 오른 것이 이미 십 여년 전이었다. 때문에 밖에 선 사내 몇몇은 하등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다만 살인사건의 키를 쥐고 있을 이천일류 검객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었다.


"자네 혼자 나가도 되겠는가?"

"선생님, 저도 같이 나가겠습니다."


최철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홀로 문을 열고 나가자 사내들이 제각기 자신 있는 기술로 최철환을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기실 최철환의 안중에 그들은 없었다. 장기인 포가권을 펼쳐 응수했는데 사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했다.


'십여 년 정도의 수련 공력. 그러나 정수를 익히지 못한 아마추어들.'

유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유도와 정제된 타격력을 갖추지 못한 가라테. 탐색이 끝나자 최철환은 포가권을 7성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몸이 어마어마한 탄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장(掌)과 권(拳)이 이르면 상대가 하나씩 펑펑 나가떨어졌다. 그러니 10여 초의 공방만에 그들 무리의 상당수가 땅바닥을 뒹구는 형편이 됐다.


'휘익!'

복면의 사내가 돌연 두 자루의 칼을 뽑아 휘두르며 최철환을 매섭게 공격해 들어왔다.


'빠르다. 그러나 역시 중수(中手) 수준!'

최철환은 모나미 볼펜 용수철과도 같은 탄력으로 상대가 휘두르는 검망을 뚫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곤 했다. 상대의 무예를 탐색하며 공수를 번갈아 했는데 여유가 만만했다.


이때 문을 열고 뛰쳐나온 김성환이 "선생님"하고 광휘를 최철환한테 던졌다. 최철환이 싸움에서 질 것을 우려한 것이라기보다 서둘러 싸움을 마무리하고 상대를 잡아서 아버지의 원수를 찾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최철환은 광휘를 한 손으로 '척'하고 받아냈다. 그러나 검을 뽑지 않은 채로 상대에 응수했다. 둘의 검은 단 일격도 부딪치지 않았다. 최철환이 상대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희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철환이 일순 '피링'하고 광휘를 뽑아 딱 한 차례 깨끗한 검선을 그렸다. 조선검법 24세 중 은망세(銀蟒勢). 은빛 구렁이가 사면으로 돌아보며 몸을 두르고 또 사면으로 노략하며 살(殺)하는 초식. 곧 최철환이 광휘를 오른편 위에서 왼편을 향해 한 차례 베어 내렸는데 이 일격에 상대의 두 자루 검이 한꺼번에 싹둑 잘려 나갔다.


상대는 귀신이라도 본 듯 잠시 멍하니 섰더니 두 동강 난 검을 들고 달아났다. 땅바닥에 쓰러져있던 치들도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함께 뛰기 시작했다.


"한 두 놈이라도 잡아 놓아야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박현무가 급히 말했다.

"저들은 그저 하수인들일뿐이야. 아마도 배후에 있는 진짜 고수가 곧 찾아올 걸세..."

최철환이 광휘를 검집에 '칭'하고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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