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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15화

나 홀로 천 명을 상대할 무예를 배우다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어, 청풍이형! 도장 가는 거예요?"

청풍이 신촌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채석환이 이지현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채석환이 180cm가 훌쩍 넘는 훤칠한 키에 나름 운동으로 다져진 건장한 체격이라 이지현 역시 작은 키가 아닌데도 왠지 왜소해 보인다. 그런 둘은 둘도 없이 다정해 보였다. 누가 봐도 정식으로 사귀는구나 싶게.


"언제부터야, 손 잡고 다닌 게?"

청풍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지현이 쑥스러운 듯 손을 빼려 하자 채석환이 왜 그래 하며 이지현을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형, 촌스럽기는."

채석환이 뻐기듯 말했다.


채석환이 이지현 꽁무니를 쫓아 도장에 나오기 시작한 게 벌써 1년 전. 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건 최근의 일이다. 신촌에 있는 E여대에 다니는 이지현이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 '옳거니'하고 거기에 채석환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 파스타 한 그릇을 후루룩 뚝딱 먹어치우고는 마치 도서관이라도 되는 양 붙박이처럼 아주 눌러붙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 이후에 말이다.


"지현이도 오랜만이네?"

"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둘이 같이 운동하고 나오는 거야?"

이지현보다 채석환 말이 빨랐다.

"형, 나는 요즘 호권 배우잖아요. 진짜 재미있어요. 지현이는 현가권을 막 시작했고요."


"그래, 열심이구나. 밥 먹으러 가는 거야?"

"치맥 하러 가요. 불금이잖아요. 파스타 그건 좀 물려서...하하!"


청풍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건넸다.

"아,...진짜 나는 형이 우리 친형이면 좋겠어요 하하!"

채석환이 변죽 좋게도 넙죽 지폐를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지현도 머리를 꾸벅했다.


"어 근데 형, 도장 가는 거예요? 금요일에는 저녁 6시 땡 하면 도장 문 닫잖아요. 우리가 나올 때 최 사범님도 '아이고, 허리야' 하시면서 변리사님, 그리고 나머지 몇몇 하고 짜장면 시켜놓고 당구 치신다고 나가셨고요. 지금 도장엔 아무도 없어요."


"그래? 여하튼 치맥 잘 하고."

"예 썰!"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둘은 정말 알콩달콩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덩치가 산 만해 늠름한 채석환. 그의 팔짱을 끼고 총총 따르는 심지 깊은 이지현.

학과 공부에 스펙 쌓기에 아르바이트에 도장에서 운동까지. 요즘 청춘들은 어느 시대 누구 못지않게 정말 열심히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풍 그 역시도 마찬가지지만.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청풍의 뺨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미소가 피어올랐다.


매주 금요일 밤 청풍이 도장을 찾아 항룡 선생한테 풍화검을 전수받은 지 6개월째. 물론 그간의 불금은 청풍한테 더없이 근사했다. 풍화검결 초식을 배웠고, 그러면 호흡을 가다듬고 심혈을 기울여 서너 시간씩 검을 연마했다.


그래야 했다. 항룡 선생이 누구를 가르치는 걸 본 적이 없다. 해서 청풍은 어깨가 무거웠다. '왜 나일까' 싶다가도 검을 제대로 연마해 꼭 성취해 내리라 하는 열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곤 했다.


청풍 혼자만의 수련.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선생은 아무도 없는 금요일 밤을 택해 청풍을 가르쳤다. 십팔기 도장 누구도, 최 사범님까지도 풍화검법을 시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풍화검은 청풍만의 것이었다. 그러니 도장 사형과 사제들 앞에서라도 풍화검을 연마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우리 청풍이 왔는고."

도장에 딸린 작은 방 문을 열자 항룡 선생이 언제나 그렇듯 함박웃음으로 청풍을 맞았다. 선생은 그 방에서 항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했다. 청풍을 가르칠 때만 방에서 나와 검을 들었다.


십팔기 도장의 3대 절정고수인 포가권 최철환, 발차기 박우현, 장창(長槍) 추영환은 항룡 선생에 대해 누차 이야기한 바 있다. 그때마다 그들은 가슴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어조가 격정적이 되곤 했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다(力拔山氣蓋世)'고 이른 서초패왕 항우. '사람은 여포, 말은 적토마(人中呂布 馬中赤兎)'라 했듯 적토마에 올라 방천화극을 휘두른 진나라 여포. 이들과 어깨를 견주는 조선의 무신(武神)이 있으니 바로 풍화검결의 정수를 깨달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경지에 오른 항룡 선생이다.


그때 청풍이 물었다.

"사형, 삼국지만 봐도 일기당천의 장수가 여포는 물론 관우, 장비, 조자룡 등 수도 없이 나오는데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요?"


최철환이 답했다.

"초절정기의 마이크 타이슨이라면 일반인 몇 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모른 긴 해도 100명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추영환이 말을 보탰다.

"맨손 맨주먹의 적수공권(赤手空拳)과 비교해 병장기를 손에 쥘 경우 무력이 10배 가까이 상승한다고 본다. 그러니 초절정 검객이라면 능히 일천명의 무사를 상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


박우현이 거든다.

"수 천년 동양 역사를 통틀어도 무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은 불과 10여 명 안팎에 불과하지. 수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무골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들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생 무술 수련에 열성을 쏟고,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자신만의 무술을 만듦으로써 극상의 무술 경지에 오르는 데 성공한 거지."


그와 같은 일기당천의 무신 항룡 선생은 그런데 꼭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할아버지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청풍이만 보면 엉덩이를 두드리고 볼도 꼬집으면서 "우리 풍이, 밥은 먹었고?" 했다. 또 무어가 그리 좋은 지 청풍이만 보면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런 항룡 선생은 무술을 가르칠 때만큼은 인류 최고의 무신으로 현현했다.


"풍아, 오늘은 복습을 좀 해보자꾸나."

항룡 선생이 목검을 들고 몸을 움직였다.


풍화검결의 첫 초식 소요유(逍遙遊).

목검이 살아있는 듯 큰 원을 반복해 그리다가 직선으로 쏘아 들어갔다. 선생의 몸놀림은 마치 귀신의 그것과도 같았다. 물리적 속도와 한계를 뛰어넘은 듯했다. 빛처럼 빠른 가운데 산처럼 묵중했다.


항룡 선생은 소요유를 처음 가르칠 때 말했었다.


어슬렁어슬렁 노닌다는 뜻의 소요유는 아무런 거리낌 없는 몸과 마음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곧 삶과 죽음의 분별까지 잊어야 한다. 그와 같이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극도의 유연함, 바로 만물을 포용하고 받아들여 검결을 여는 근원적 힘이다. 하여 풍화검결의 일초식이 소요유다.


항룡 선생이 검 초식을 이어나갔다.


강유겸전(剛柔兼全), 강하되 부드럽고 부드러우면 곧 강해진다. 무영무형(無影無形), 검이 빠르면 그림자도 형태도 사라진다. 검출여룡(劍出如龍), 검을 뽑으니 용이 승천한다. 검광만장(劍光萬丈), 검광이 만 길에 이른다. 장풍파천(長風破川), 거센 바람이 강물을 가른다...


청풍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어느 순간 풍화검을 펼치는 선생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고 대신 수 십 수 백개의 목검이 도장 안을 꽉 채웠다.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이 검기(劍氣) 일 거라고 짚어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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