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오빠, 청풍오빠, 여기 자주 오는 식당이에요?"
"아냐, 처음이야."
서래마을의 한 프렌치 레스토랑. 청풍이 선화와 사실상 첫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그래서 머릴 싸매고 하루 종일 검색한 끝에 골라낸 식당.
"어, 그럼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
"선화가... 아 선화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벨라라고 할까?"
"오빠가 좋은 이름으로 부르면 돼요." 선화가 밝게 웃었다.
"그럼, 골프장이나 연습장에서는 벨라, 그 외에는 선화라고 부를게."
청풍은 둘 다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괜히 자꾸 이름을 부르고 말을 시키고 싶었다. '난 원래 말수가 적은데 왜 이럴까' 생각이 들 정도로 선화 앞에서는 사람이 180도 바뀌는 거다.
"선화가 이런 분위길 좋아할 거 같아서."
"오빠, 저는 진짜 진짜 음식 안 가리거든요." 그녀는 발랄한 십 대 마냥 말했다.
"프렌치, 이탈리안, 중식, 일식, 한식... 순댓국에 소주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감자탕, 김치찌개 맛집도 꽤나 잘 찾아다니는걸요."
청풍의 눈에는 선화가 무얼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예뻐 보였다. 선화랑 같이라면 식당 어디라도 좋을 거 같다. 그녀도 그런 걸까 생각하니 청풍이 가슴이 설렜다. 이 모든 게 청풍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니까.
"오빠, 음악 좋아해요?"
"응, 여러 장르를 듣기는 해. 근데 딱히 조예가 깊은 분야는 없어서."
"음악 공연이나 미술 전시회도 자주 가요?"
"아니, 그건 그냥 아주 가끔씩 가는 정도야. 같이 갈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럼 오빠, 앞으론 저랑 보러 다녀요."
선화가 테이블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또랑또랑 큰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화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청풍은 멍한 눈이 됐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단 말인가!'
"정경화 선생님 공연이 곧 있어요. 오빠 같이 가요."
"좋아, 같이 가자."
청풍은 정경화의 공연을 본 적이 없지만 꼭 가보고 싶긴 했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 때문이다.
17~18세기에 만들어졌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꼽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정경화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음색을 "아무리 슬퍼도 너무 고고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는 귀족 같다"고 평했다. 대신 과르네리 바이올린은 "울고 싶을 땐 땅바닥에 앉아 통곡할 수 있는 솔직한 농부 같다"고 비유했다.
세상에는 어느 분야든 고수가 정말 많구나, 하고 청풍은 생각했었다. 명기를 만든 장인도, 몇 백 년 장인의 숨결까지 느껴 호흡하고 연주하는 능력을 갖춘 음악가도.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소리는 정말 다른 거야?"
"아 그건 꽤 미묘한 문제예요. 연주자가 악기와 호흡하게 되면 자기만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고 저는 생각해요. 좋은 악기를 완성하는 건 결국 연주자인 거죠."
정경화는 처음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푹 빠졌지만 연륜이 깊어가면서 과르네리를 더 애호한다고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로는 밝고 귀족적인 느낌, 투명하고 맑은 음색, 섬세한 표현이 요구되는 곡을 주로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같은 곡들이다.
과르네리로는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깊은 내면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곡을 연주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인류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든 전설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주세페 과르네리 델 제수가 수 백 년 전 만든 바이올린을 정경화는 이렇게 완성해 냈다.
"단서가 될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최철환이 종로경찰서장이 앉은자리 앞 테이블 위에 책 한 권을 탁 하고 올려놓았다.
박현무가 예의 호기심을 드러내며 책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니, 이 사람 이게 도대체 뭔가?"
얄팍한 두께의 책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진귀해 보이는 한지로 만들어졌으나 세월의 때가 묻어났다.
표지에는 한자로 '劍(검)'이라고만 적혀있다.
마치 유명 검객이 쓴 글씨처럼 필체에 힘이 넘쳤다.
"검보일세."
"검보라면, 검법이 수록된 책이라는 이야긴가?" 박현무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이건 조금 달라. 검의 내력을 담은 책이야."
"검의 내력? 그럼 '천광의 자'인가 뭔가 그 유파의 고수가 쓴 검이 여기 이 책에 나와 있다는 말인가?"
박현무는 역시 머리회전이 빨랐다. 경찰서장은 어리둥절 듣고만 있다.
최철환이 첫 장을 넘겼다. 일필휘지로 쓴 듯이 보이는 문장이 나타났다.
"필생의 공력과 혼을 담아 여기 세 자루의 검을 지었다. 검의 생명은 내가 불어넣었으되, 이를 쓰는 자가 검을 완성할 것이다. -幽寒- "
"유한(幽寒). 검을 만들고 이 책을 지은 사람이구나."
박현무가 탄식했다.
"이름난 분인가?"
"유한 최현. 왕실 사인검(四寅劍)을 만들던 조선시대 최고의 검 명인이었네."
"사인검이라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검 아닌가?"
"유한 선생은 말년 왕실의 허락을 얻어 검을 만드는 관청에서 물러난 뒤 이 세 자루의 검을 만든 거네."
"서장님, 이 책은 무가(武家)의 책입니다.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 오픈하는 걸 양해 부탁 드립니다."
"변리사님, 물론입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박현무가 초초한 듯 손바닥을 비벼댔다. 서문 다음에는 분명 세 자루의 검 이야기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최철환이 페이지를 넘겼다.
예리하게 벼려 날이 시퍼렇게 선 검 한 자루가 그려져 있다. 다음과 같이 발문이 적혀있다.
광휘(光輝). 빛과 같이 빠른 검이다. 철을 빈틈없이 골라 녹이고 수 만 번을 두드려 손에 쥐면 날아갈 듯한 검을 만들었다. 검신(劍身)이 종이 몇 장의 두께와 같이 얇아서 공력을 갖춘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찌를 수도 벨 수도 없다. 주인을 찾으면 검은 마땅히 빛을 뿜으리라. 3년에 걸쳐 이 검을 지었다.
"광휘구나!" 박현무가 다시 탄식했다.
"피해자 상흔이 마치 두부에 면도날을 박았다가 뽑은 것처럼 얇았다고 했지요? 검신, 즉 칼의 몸체 전체가 얇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천광의 자검 고수가 광휘를 사용해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광이라는 검술유파가 요즘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그 유파가 광휘라는 검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서장이 물었다.
"요즘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검술 유파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들만의 세력을 갖추고 있을 겁니다. 드러내 놓지 않을 뿐이지만."
"그럼 어떻게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3년 전쯤 전시회에 갔다가 사인검과 함께 전시된 광휘를 보았습니다. 전설 속의 명검이 전시회에 나오다니 매우 의아해했었지요. 분명 이 책 그림과 같이 검신에 '광휘'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후일 연유를 들으니 개인 소장자가 전시를 위해 잠시 내놓았었다고 합니다. 소장자를 수소문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변리사님, 감사합니다."
경찰서장이 말을 보탰다.
"참, 살해당한 김 씨를 조사하다 보니 30여 년 전에 귀화한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새로 나왔습니다. 그 뒤로 줄곧 골동품 관련 일을 해온 듯합니다. 진귀한 물건들은 일본으로 밀반출한 정황도 꽤 나왔고요. 야쿠자 세력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김 서장, 곧 뭔가 단서가 잡히겠구먼."
박현무가 고향 후배인 서장한테 이렇게 말하는 참에 최철환이 책을 탁 하고 덮었다.
"어어, 이 사람아, 왜 이러나. 나머지 두 자루 검도 보여줘야지 사건을 해결할 것 아닌가."
"미안하네. 지금으로서는 나머지 두 자루 검은 사건과 연관이 없네. 아까 말했듯이 이건 무가의 일이야. 막무가내로 공개할 수가 없는 거라네."
경찰서장 방을 나오면서 박현무가 최철환 어깨에 손을 척 얹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참 고지식하기는. 이 책은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가? 나한테 그냥 하루 이틀만 빌려주면 안 되겠는가? 내가 책 좋아하는 거 알잖은가."
"미안하네." 최철환이 딱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