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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13화

그녀의 스윙, 날아가는 공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강선화, 그러니까 지금 KLPGA 투어프로인 그녀는 16년 전 청풍을 처음 보았다. 호반의 도시에 늦봄 아지랑이가 솔솔 피어오른 날 남녀공학인 고등학교 도서관에서였다.


막 그 학교에 들어간 선화는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 자주 들렀다. 미술책과 음악책을 즐겨 보았다. 그 분야 책이라고 해봐야 고작 백 여권이 전부여서 그날그날 보고 싶은 책을 뽑아서 서가에 선 채로 읽고 또 읽다가 종이 울리면 교실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거기서 청풍을 보았다. 서가에서 이십 여 미터쯤 떨어진 창가 2인용 테이블에 앉아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청풍. 손에 낀 책 몇 장을 넘기다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자기 자리인 양 매번 같은 곳에 앉은 청풍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눈에 불을 켜고 책이 뚫어져라 보기도 했고, 다음 장이 궁금한 듯 책장을 재빨리 휘리릭 넘겨 보기도 했으며, 고른 치열을 드러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 선화는 청풍한테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까 생각이 들자 괜히 혼자 가슴이 뛰었다.


초가을 어느 날 선화는 교정을 걷던 청풍을 가리켜 누구냐고 물었다. 단짝 혜선이가 말했다. "그 유명한 가을의 전설 '천. 파.' 이청풍 선배잖아, 몰라?" 선화는 속으로 읊조렸다. '가을의 전설 이. 청. 풍.'


그 가을 언제부턴지 선화는 학교에만 가면 자신이 중력을 거슬러 청풍의 주위를 하늘하늘 떠다니는 고무풍선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만약에 누군가를 그리워할 만큼 하늘이 푸르른 날이 있다면 꼭 그날이었을 것이다.


선화가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를 따라 골프 연습장에 갔던 선화는 재미 삼아 골프를 배웠는데 특출한 재능을 넘어 투어프로로 대성할 거란 전망이 여기저기서 많았다.


선화는 그날 점심시간 내내 도서관 서가에 기대어 창가 2인용 테이블을 지켜보았지만 청풍은 그날따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선화는 그 테이블에 앉아서 청풍이 통창 너머로 때때로 바라다보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마치 샤갈의 파란색 같았다. 선화는 필통에서 새파란 사인펜을 꺼내 흰색 테이블 위에다 엄지손톱만 한 하트를 그려 넣었다. 미국에 가면 영어 이름으로 샤갈의 뮤즈 '벨라'를 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세월이 흘러 흘러서 불과 2주 전. 신촌 네거리에서 청풍의 모습을 발견하고선 얼마나 놀랐던지. 고교시절 짧은 까까머리가 곱슬기 있는 긴 머리로 바뀌었지만 해맑은 얼굴과 단단한 체구가 그대로인 청풍. 그 일행이 들어간 무술도장까지 따라 들어간 선화.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 '오비가 나면 어때, 드라이버는 힘껏 쳐야지' 하고는 청풍이 등짝을 손바닥으로 냅다 후려치고는 "오빠~, 청풍 오빠!" 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럼에도 이청풍이, 그러니까 남녀의 일에 있어서 숙맥도 아주 완벽한 숙맥으로 눈치코치가 흐리멍덩하기 짝이 없는 녀석은 선화의 등짝 강스파이크를 맞고 나서도 정신이 들까 말까 했다.


물론, 이 멍텅구리도 16년 전 고교 도서관에서 노란색 페인트로 칠한 예술코너 철재 책장에 붙박이처럼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던 동화 속 소녀 같은 소녀를 나름 눈여겨보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도 너무나 당연하게도 소녀 얼굴을 한 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기억하는 거라곤 어렴풋한 실루엣이 전부였다. 그러니 강스파이크의 주인공이 그때 그녀라는 건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그 고교시절, 눈이 부시게 한없이 푸르던 날 도서관 테이블에 엄지손톱 크기의 하트가 새겨진 걸 보고는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보면서 "이게 언제 생겼지, 안 지워지는구나!" 하긴 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샤갈의 마을 같은 호반의 도시에 눈꽃이 펄펄 날렸다. 청풍은 도서관 자신의 자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소녀가 섰던 빈 서가를 바라다보았다.


"강선화 프로님 만나러 왔는데요."

"아, 벨라 프로님이요? 레슨 받으시게요?"

"아뇨, 아는 후밴데... 여기 오면 볼 수 있다고 해서요."

"아 그러세요?"

직원이 골프 레인지 타석을 조회해 보더니 말했다.

"2층 17번 타석에서 레슨 중이세요. 올라가 보세요."


청풍은 골프 레인지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타석에서 쏘아져 녹색 그물망을 향해 날아가는 숱하게 많은 흰색 골프공들. 따각따각 타구음에다 "아, 오늘 왜 이러지" 중얼중얼한다든지 "컴온!"을 외치는 골퍼들. 초저녁부터 골프연습장의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하러 이토록 열심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골프 그립은 뉴트럴로 잡는 게 좋아요. 그립이 또 스트롱하게 바뀌었거든요. 당장은 볼이 잘 맞을 수 있어도 연습량이 부족하면 공치기가 훨씬 더 힘들어질 거예요."

선화가 40대로 보이는 여성 골퍼한테 말했다.

"볼 스트라이킹을 만드는데 집중하셔야 돼요. 그건 몸 전체의 큰 근육을 활용한 스윙을 할 때만 가능해요. 오랜 시간을 두고 스윙을 만들어가는 게 손해 같지만 결국 그게 남는 거예요. 빨리 가려다 방향을 잃으면 되돌릴 수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다가 뒤를 돌아본 선화가 청풍을 발견하고는 하늘에 걸린 파스텔톤 노을만큼이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회원님,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오빠, 웬일이에요?"

아무렇지 않은 듯 꾸몄지만, 사실 선화는 파이널 라운드에서 우승을 다투는 마지막홀 티샷을 하는 것처럼 용기를 내서 말한 거였다.

"응,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어딜 지나가다가 들러요, 호호."


청풍이 머리를 긁었다.

"멋있어!"

"뭐가요?"

"골프 프로의 삶 말이야."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요. 시즈 더 데이(Seize the day)!"

"여기서 직접 공도치고 그래? 한 번 보여줄 수 있어?"

"아, 잠깐만요. 제 클럽을 가져올게요."


박현무가 수제비집에서 청풍한테 말했었다.

"강선화는 타고난 골퍼야. LPGA서 뛸 때 투어프로들끼리 서베이를 하면 가장 좋은 스윙을 가진 프로로 그녀가 항상 첫손가락으로 꼽혔어. 정말이지 완벽한 스윙이야. 그렇게 뷰티풀 한 스윙은 세계 여성골프 역사를 통틀어도 몇 명 없을 정도니까."


"오빠, 이게 7번 아이언이에요. 보통 골프를 처음 배울 때 시작하는 클럽인데, 쳐 볼게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골프는 모르지만 그녀의 스윙은 완벽 그 자체였다.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터지는 탄성. 하체를 단단히 잡은 채로 몸을 한껏 꼬았다가 부드럽게 풀어놓는 스윙.


최철환 사형이 말한 그대로다.

"모나미 볼펜 용수철 끝을 모아 잡았다가 놓으면 생기는 탄력을 생각해 봐. 주먹 지르기와 발차기는 꼭 그렇게 해야 돼. 단단한 하체와 부드러운 상체의 꼬임을 만들어야 가능한 거라고."


"뭐라고? 벨라 프로님이 캐디백을 꺼내 왔다고?"

"타석에서 클럽 별로 풀샷을 하고 있어."

"진짜야?"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홍해가 갈라진 것과 같았다. 선화, 아니 벨라 프로가 클럽을 뽑아 들자 2층 전 타석의 골퍼들이 우르르 17번 타석으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캐디백을 꺼내와 풀샷을 때리는 장면은 너무나 진귀해서 골퍼라면 직관을 결코 놓칠 수 없다.


"청풍 오빠, 드라이버도 한 번 쳐 볼게요."


"우와, 공이 완전히 빨랫줄로 날아가네."

"벨라 프로님, 굿샷!"

"브라보! 브라보!"


청풍한테는 그 많은 갤러리의 찬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먹먹했다.

그의 눈에는 선화와 그녀의 스윙과 날아가는 골프공만 보일 뿐이다.

아름답다.


벨라 프로가 30여분이나 회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을 때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빠도 배워 볼래요?"

"아! 그래, 생각해 볼게."


청풍은 선화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십 수년의 시공을 넘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지켜본 쪽이 상대를 마음에 품었다.

마땅히, 사람들은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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