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1편 '신묘한 몸놀림'부터 정주행 추천 드립니다.^^
"아직 배가 덜 찬 거 같기도 하고."
채가 아쉬운 듯 수저를 따그닥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곱빼기로도 부족하신 거예요? 이거라도 더 드시든지요."
채가 못 이기는 척 박의 수제비 그릇을 제 앞으로 당겨다가 수저를 찔러 넣는다.
"그런데 매화나무는 또 뭐예요? 그걸 베었다고요, 검으로? 왜 하필."
"왜일까 공대생, 추론을 좀 해봐라."
짱구를 굴리던 채가,
"멋있어 보이려고? 매화나무 하면 왠지 있어 보이잖아요. 꽃이 화려해서 풍류 어쩌고도 말이 되는 거 같고, 사군자 중 하나로 추운 겨울을 견디고 가장 빨리 피는 꽃 어쩌고라고도 했으니 뭐 기개니 절개, 고결함 그런 것도 따다 붙이기 좋을 거 같고." 했다.
"잇 메익스 센스(It makes sense)!"
박은 조선 3대 고수의 최초 회동을 그야말로 전설로 보았다. 구전(口傳)과 가필(加筆)로 구성된 이야기. 전란을 끝낸 조선에 찾아온 찬란한 봄을 기리는 장치로 매화나무 앞에다가 전쟁 영웅 세 고수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민심이었다.
아, 매화나무는 단단하기로 짝이 없어서 검으로 베어내 그 기예를 따지기에도 안성맞춤이었을 거라고 여기서 박이 다시 말을 더 보탰다.
때는 바야흐로 만춘(晩春), 전라도 구례의 화엄사, 수 백 년 수령의 매화나무 앞. 만개한 분홍빛 매화꽃이 바람결에 일렁였다. 무예를 겨루는 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청풍이 숨을 죽이고 이야기 속으로 따라 들어간다.
박정명이 먼저 나섰다. 평안도 의주의 내로라하는 거상의 아들로 이제 사십 대 초반. 건장한 체구에다 안광(眼光)이 형형한 것이 누가 봐도 힘깨나 쓰는 장사다. 그가 돌연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매화나무 둥치를 밟고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빼어 내 매화나무 맨 꼭대기 가지를 베고난 뒤 공중제비를 돌아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수천 금을 주고 샀다는 보검은 이미 칼집에 들어가 있는 대신 그의 손에는 매화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쾌검(快劍)입니다. 빠르지 않으면 결코 상대를 벨 수 없으니 가장 강한 검은 바로 쾌속지검(快速之劍)이라 할 것입니다."
정명이 그리 이르고는 뒤로 물러섰다.
"멋있네요. 거상 아들이라고 진짜 엄청 비싼 보검까지 차고 다녔군요. 그러고 보니 쾌검이 최고인 거 같은데요. 빠른 검을 누가 이기겠어요? 박정명 브라보!"
채가 아주 흥이 나서 박수까지 치며 지껄였다.
박이 말을 잇는다.
정동화. 경상도 청도의 한 도교 문하에서 오십 평생을 수행해 온 도인. 얼핏 붉은빛이 감도는 얼굴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만드는 웃음기가 얼굴에 잔뜩 배어있다. 그가 조용히 소매 자락을 날려 가볍게 검을 뽑아내더니 한 번 매화꽃을 찌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안온한 얼굴로 섰다. 바람이 불어 매화꽃이 표표히 날렸다. 그런데 보아하니 검이 이른 나뭇가지의 꽃송이는 모두 딱 절반씩만 잘려나가 있는 것 아닌가. 일검만으로 대여섯 개의 꽃송이를 정확히 베어낸 신출귀몰한 솜씨.
"정검(精劍)이라 하겠습니다. 무릇 정중동(靜中動)이라 했지요. 정에서 동이 나오고 동은 곧 정으로 바뀌는 것인데, 그 이치를 정확히 갈파해 뚫고 들어가는 정밀지검(精密之劍)이라면 달리 상대가 없을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매화 꽃송이라면 2~3센티 정도 될 텐데. 매화가지에 높낮이가 다르게 매달린 꽃송이를 정확히 잘라냈다? 히야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군요. 아아, 정검이라!"
채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역시도 십팔기 도장을 다니며 칼을 휘둘러 본, 허접은 하나 그래도 나름 무술인이다.
청풍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제 풍화검이다. 그가 항룡 선생께 배우고 있는 바로 그 풍화검결의 유래를 듣게 된다.
이천일의 자태는 마치 수 백 년 수령의 매화나무와 꼭 같았다. 푸른 도포를 입었는데 낡아 빛이 바랬고 머리에 쓴 검은색 갓 역시도 귀퉁이 일부가 뜯겨 나가 세월이 묻어났다. 그러나 굳은 입매와 꼿꼿한 몸 가짐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그런 그는 검을 겨루는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매화나무를 등지고 서서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보는 것인지 그 뒤에 막 푸른빛이 올라오는 산을 보는 것인지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다. 느닷 매화나무 가지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데 천일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듯 일검을 등 뒤쪽으로 쳐냈으니 무엇인가 거무튀튀한 것이 휙 지나갔다. 마침 퉁소 크기의 흑빛 썩은 가지가 부러져 떨어진 것인데 천일이 뽑은 검은 그보다 더한 먹빛이었다. 매화가지는 길게 두 쪽으로 쪼개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검은 그저 검일 뿐입니다."
"뭐라고요? 그게 끝이에요? 이천일이 조선제일검이라면서요? 썩은 가지 베는 게 어려운 건가요?"
채가 보채고 나섰다.
청풍은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검은 그저 검일 뿐이다.
그날 천일이 휘두른 것은 검이 아니라 그가 주워 들고 있던 썩은 매화가지였다. 이름난 선비였던 그의 조부가 전란과 징비(懲毖)의 시대, 전답을 모두 팔아 곤궁한 백성들에게 내놓고 경기도 포천으로 들어갔으니 천일은 그때부터 책을 읽고 검을 연마하는데 정진했다. 사상을 세우고 백성을 위한 칼을 갈았다. 글월을 깨치는데 영민했던 천일은 무예에도 천부적 소질을 보였으니 어느 이름 없는 무관이 전수한 본국검을 익혀 자신만의 검법으로 다듬어 나갔다. 하여 그의 나이 삼십 세부터 이미 조선 무림에 무명(武名)이 높았다. 그날 동화와 정명은 오십 중반에 접어든 천일의 검술 경지를 찬탄해 "바람과 같고 꽃과 같은 검"이라 칭했으니 바로 풍화검(風花劍)이다.
"뭐라고요? 풍화검, 그게 이천일이 스스로 지은 검법 이름이 아니라고요? 사실상 조선 3대 고수의 공동작명이었다는 겁니까? 근데 풍화검이 실제로 있기는 있는 거예요?"
채가 다시 보채고 나섰다.
"쾌검이니 정검이니하고 풍화검은 디멘션이 다르잖아요. 빠르거나 정확한 거하고, 바람과 꽃과 같은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데요. 무언가 시공을 초월한 검 같은 느낌적 느낌..."
박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말을 받았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풍화검법이 어떤 모습의 검인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거든. 다만, 바람과 같다고 한 것은 천일의 사상적 측면을 추앙한 것이고, 꽃과 같다고 한 것은 검법의 물리적 단순함의 미학을 칭송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청풍이 항룡 선생을 처음 만난 날 선생은 말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써라. 얽매임 없이 살거라. 세상을 품어라."
청풍은 이 문장들을 다시 곱씹어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