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검은 그저 검일 뿐이다."
청풍은 몽롱했다. 무언가 가슴속에 꽉 차오르는 아릿한 감정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이제 나갈까?"
박현무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기자님."
채석환이 따라 일어선다.
"오늘은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술이요? 그럼 맥주 먹으러 가는 거예요, 선배님?"
"요 앞에 와인바가 생겼던데 오늘은 거기 가서 조용히 이야기도 좀 하고."
"와인바요? 빨리 가요, 선배님."
석환이 현무의 팔짱까지 끼며 아주 신이 났다.
"풍이는 도장에 들러서 최철환이 좀 모셔오시고. 아까 보니까 포가권을 열 번 넘게 수련하고 있던데 지금쯤은 마무리할 시간인 듯하니까."
그날 현무의 레이더 안에는 청풍뿐 아니라 철환까지 들어가 있었다.
"철환 사형은 술 잘 안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예뻐라 총애를 받는 풍이 네가 좀 모셔오라는 말씀입니다."
현무는 매사 그렇게 용의주도했다.
와인바에 들어서자 석환은 기분좋게 떠들어 댔다.
"우와, 깔끔한 우드톤 인테리어에 은은한 조명까지 아주 쩌네요. 앞으로 형님으로 모실게요, 형님."
"이 녀석아, 내가 결혼만 빨리했어도 너 같은 아들이 있어. 수제비 사면 기자님, 맥주 사면 선배님, 와인 사면 형님인 게냐?" 현무가 손사래를 치다가 허허 웃고 만다.
"형님, 저 와인바 처음 와봐요. 엄청 비싼 와인들도 있네요. 이런 거 막 시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석환이 와인 리스트를 펼쳐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와인부터 맛 들이면 안 돼. 브레드 앤 버터 샤르도네 이 정도면 되겠다. 빵 좋아해? 이 와인은 진짜 빵과 버터 맛이 나거든. 캘리포니아 와인이지. 귀하는 캘리포니아 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드는고?"
"물론 실리콘 밸리죠. 저도 공대생이니까요."
"캘리포니아주 지디피(GDP)가 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네 번째란다. 정말 대단은 하지. 서부 개척 시대의 골드 러시를 만든 캘리포니아가 지금은 아이티(IT) 혁신 문명으로 세계의 부를 또다시 거머쥐고 있으니 참 축복받은 땅일 수도 있어.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홀에 잔잔히 울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던 현무가 "이 노래 아니? 빌리 조엘 '피아노 맨'.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야. 바텐더 존은 영화배우가, 부동산중개인 폴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이 노래 가사대로 말이야. 돈에 매인 현실과 가슴속 이상의 괴리... 사람이 좇을 수밖에 없는 진정한 욕망, 그게 뭔지 알아?"라고 말하는 와중에 청풍이 철환을 데리고 들어섰다.
"풍아, 이게 캘리포니아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무슨 생각이 나는고?"
"존 스타인백 '분노의 포도'요? 대공항과 더스트 볼(dust bowl)로 삶의 터전을 잃은 오클라호마 오키스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찾아간 곳이 캘리포니아 포도농장이잖아요."
"맞아, 그것 역시도 캘리포니아 드림이었지. 욕망과 현실은 그렇게 항상 뒤죽박죽이니까..."
"이 친구 벌써 취한 거야?"
포가권의 절대고수 철환은 현무와 나이가 같아 서로 허물없이 지낸다.
"무슨! 친구야 먼저 한 잔 받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현무가 정색을 한다. 이내 냉철한 머리의 기자 본색을 드러냈다. 분명 도장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어서 철환을 밖으로 불러냈을 터다.
"오래 알고 지내던 종로서장이 며칠 전 전화를 걸어 '경찰서로 들어와 달라' 길래 찾아갔지. 지난 5월, 그러니까 세 달 전쯤에 살인 사건이 났는데 단서 하나가 잡히지 않고 있어서 장기 미제가 될 거 같다고 하더군. 다만 무술고수에 의한 살인 같다고."
"무술고수에 의한 살인? 아직도 그런 일이 벌어지나?"
"그러니까 말이야. 무학(武學)으로 치자면 수 십 년 무술서를 파고든 자네만큼 뛰어난 사람이 어디 한국에 있느냔 말이지. 자네의 고견이 필요하다고. 살인사건 아닌가."
철환이 미간에 내천(川) 자를 그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씀해 보시게."
5월 중순 하루 종일 비가 뿌린 날. 저녁나절이 되자 빗줄기는 여름을 재촉이나 하듯 굵어짐. 오후 8시 35분 고미술품 화랑 주인 김 모(75세)씨가 인사동 가게문을 닫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인적이 꽤 많은 메인 스트리트로 들어섬. 이때 검은색 우비와 모자로 가려 얼굴을 식별할 수 없는 키 180cm가량의 건장한 체격의 용의자가 가로등 밑에 섰다가 기다렸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김 씨에게로 다가감. 둘 간 거리가 2미터쯤 될만한 찰나 김 씨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짐. 용의자는 김 씨를 지나쳐 오던 길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짐. 주위를 지나던 행인들이 쓰러진 피해자와 길바닥 빗물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보고 119에 신고. 8시 49분 김 씨 사망. 경찰 추정.
"사인은?"
"날카로운 흉기 자상에 따른 과다 출혈."
"자상 부위는?"
"심장."
"상처의 폭과 깊이는?"
"폭 4cm, 깊이 역시 4cm로 가슴 피하조직 3 cm, 심장 1 cm."
"목격자가 있었나?"
"살해 장면을 본 목격자는 없어. 대신 용의자가 서 있던 가로등 뒤편에 cctv가 있었어."
"cctv에 흉기가 포착됐던가?"
"아니, cctv가 각도상 용의자 바로 뒤편에 있어서 흉기 노출은 없었어."
"용의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고 했지? 그 속도로 김 씨를 그냥 지나쳐간 건가?"
"맞아, 정확해.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었어."
"상처 모양이 어땠나?"
"경찰이 놀라는 부분이 이 지점이야. 마치 두부에 면도날을 박았다가 뺀 듯 상처 두께가 매우 얇고, 자를 대고 찌른 듯 상처가 완전한 직선 모양이었다는 거야."
"천광(天光)의 자(刺)"
철환이 탄식했다.
"그게 무언가?"
"천광은 쾌검류 중 가장 이름을 떨친 고검 유파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처럼 빠른 검."
"자는 찌를 자 말인가?"
"맞아. 천광은 다시 찌르기 위주의 자검(刺劍)과 베기 위주의 감검(砍劍)으로 나뉘지. 용의자는 자검의 고수야."
"어느 정도의 고수인가? 자네보다도 상수인가?"
"아무리 우비를 걸쳤다고 해도 뒤편 cctv에 검이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몸 안으로 갈무리한 절제된 발검(拔劍),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정확한 깊이와 한일(一)자 모양으로 낸 상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고수 같아. 실제 이 정도 고수라면 진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목검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상할 수 있거든. 다른 특이점이 있었을 텐데?"
"우산대에 검흔이 남았어. 약 2mm 깊이로. 김 씨가 쓰고 있던 우산 말이야."
"역시 그렇군. 김 씨가 상대의 검을 쳐내려고 격검(擊劍) 동작을 했던 거야. 그 역시 검의 고수였던 거지. 해서 용의자가 알루미늄 우산대를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보검(寶劍)을 사용한 거지. 상대에 대한 예우일 수도 있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데 보검을 사용했다고 예우라고 할 수 있겠나?"
"그건 아주 오래된 보검일 거야. 게다가 날까지 날카롭게 벼린. 족보 있는 가문의 인물을 욕보이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최고의 병기지. 용의자는 당연히 cctv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보란 듯이 검을 뽑은 거지. 상대 세력에 대한 경고야. 더 이상 나서지 말라는..."
"상대 세력? 결국 돈을 두고 벌이는 세력싸움이란 건가?"
"그런 게 아닐거야. 아무래도 이건 무가(武家)의 일 같아. 검과 검법을 둘러싼 명분과 욕망의 전쟁!"
청풍과 석환은 숨을 죽여 듣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