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어쩌다 보니, 정말이지 이런 조합은 도대체가 나올 수가 없는데, 세상일 저 혼자 다 아는 듯 젠체하는 박현무가, 자신이 도장에서 가장 무시하는 1인인 채석환이를 데리고, 거기다가 청풍이까지 팔짱을 단단히 끼어 낚아채서는 사실상 질질질 끌다시피 하여서 마약 수제비집을 끝끝내 찾아갔다.
"풍, 이 집 좋아하잖아!"
박은 언어가 참 경제적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라면 누가 말리기 전에야 좀체 끊는 법이 없지만 멋쩍을 때는 단말마에 가까운 어휘를 구사한다. 보통 이 경우 그는 분명한 목적성을 띤다. 오늘 사냥감은 보나 마나 청풍이다. 채는 구색을 맞춘 스끼다시일 뿐.
"저는 곱빼기 할게요."
"네네, 많이 드세요. 언제 곱빼기 안시키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박과 채 간에는 항상 이런 식이다.
"바른대로 말해."
박이 별안간 두꺼운 뿔테 안경 속 작은 눈을 반짝이며 청풍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어, 뭘 말이에요?"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니 등판을 찰싹 찰지게도 때리신 그 여성분 말입니다, 누구시냐고요? 책과 운동에만 빠져 산 모태솔로인 줄로 알았더니 나름 그런 재주도 있으십니다, 그려."
"아, 고등학교 후배예요."
"후배? 남녀공학 나왔나? 몇 년 후밴데?"
"2년 후배라고 하더라고요."
"하더라고요? 잘 모르는 후배라는 주장인가?"
"네, 맞아요. 그런데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자니 왠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아요."
청풍이 얼굴에 알듯 모를 듯 미소가 다시 번졌다.
"같아요? 갈수록 태산이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시길래 도장까지 찾아오셨던가?"
"KLPGA 투어 프로래요."
"어? 투어프로? 이름이?" 스포츠부 선임기자 박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선화예요."
"강선화, 강선화라..." 박이 딴에는 제법 머리를 굴린다.
"아, KLPGA 2승을 하고 부상으로 은퇴한 비운의 그 강선화? 아뿔싸.. 모자도 안 쓰고 긴 생머리로 나타났으니 알아볼 재간이 있나."
"저는 골프는 잘 몰라서요."
"그런데 도장에는 왜 왔대?"
"그것도 모르겠어요. 어디 근처에 왔다가 우연히 들른 건지."
"바보야, 설령 근처에 왔다손쳐도 대관절 누가 십팔기 도장 안까지 우연히 들어오냐? 그게 말이 되니?"
청풍이 머리를 긁을 뿐이다.
"이모, 단무지 좀 더 주세요."
수제비를 바삐 입으로 퍼 넣던 채가 카운터를 보고 소리쳤다.
"에라, 이 단무지 같은 녀석아! 잠깐만 좀 조용히 해줄래?"
박이 갑자기 안색을 바꿔 따지듯 캐묻는다.
"풍, 똑바로 말해."
막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신문사 어느 부서에 있든 간에 항상 두각을 나타냈던 천상 타고난 기자 박현무. 집요한 취재, 그리고 그렇게 모은 팩트를 기반으로 세운 분석과 통찰이야말로 그의 최대 무기다.
그런 박이 청풍이한테 뭔가 낌새를 단단히 챈 것이다.
"풍, 너 요즘 달라졌단 말이야. 당연히 그 강선화 때문은 아니고 말이지."
박은 한 번 레이더 안에 먹잇감을 넣고 나면 쉬이 놓는 법이 없다.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인다. 그래서 상대가 제풀에 꺾여 실토를 하게 만들고야 만다.
박이 청풍이 눈치를 조심스레 살펴가며 말을 잇는다.
"풍화검이라고 있다."
청풍이 가슴이 갑자기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한다. 그가 항룡 선생으로부터 풍화검결 이야기를 처음 듣고난 직후 남몰래 검법을 수련해 온 지 이제 갓 서너 달. 초식을 하나둘씩 배워 나갈 때마다 자기만의 방에 무슨 가보라도 차곡차곡 쌓아가는 양 가슴이 벅찬던 까닭이다.
'풍화검결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게다가 박 선배가 지금 이 시점에 왜 내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애당초 항룡 선생이 이른 바 없으나 청풍은 왠지 풍화검결 수련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해얄듯 느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풍의 안색을 살피던 박이 '옳거니' 청산유수로 말을 이어 나간다.
조선 중기, 그러니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잦았던 변란의 시대, 조선 팔도(八道) 무림에 은거하던 검객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곧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유교와 유림의 나라 조선에도 분명 무림이 존재했던 것인데 당시 무명(武名)을 떨친 고수들 중에 사람들이 후일 '조선 3대 고수'를 꼽았으니 바로 이천일, 정동화, 박정명이었다. 이들이 서로 검을 맞대 법도를 논한 적 없으나 매화나무 가지를 베어내 그 모양으로 우열을 가린 바 이천일이 그중 으뜸이라 가히 '조선제일검' 칭호를 얻었다. 천일은 그가 스스로 창안한 풍화검(風花劍)으로 이름이 높았다. 바람(風)처럼 얽매임 없는 검. 그러나 화(花)를 두고서는 그 해석이 엇갈려 누구는 "꽃처럼 아름다운 초식", 누구는 "화려한 초식까지 모두 버리고 난 뒤 이룬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풀었다. 풍화검법은 무슨 연유에선지 단 한 사람만을 택해 전수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