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타이거 우즈가 왜 대단한지 알아?”
신문사 선임기자 박현무가 도장 창틀에 기대 선 채 까마득한 대학 후배이자 공대생인 채석환을 또 괴롭힌다. 박은 몸을 움직이기보다 입을 터는데 더 이골이 난 사람이다. 채가 못마땅한 눈치를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너 같은 애들이 좋아하는 게 유튜브잖아. 2000년 전후 전성기 시절의 타이거 골프스윙 영상을 한 번 찾아봐라. 왜 우즈가 대단한 지 알게 될 거다.”
“대학생이 골프를 어떻게 압니까. 1도 관심 없습니다.”
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석환아, 운동은 결국 다 같은 거야. 공자 선생이 말씀하신 일이관지(一以貫之), 그게 오로지 충(忠)이니 서(恕)니 그런 개념에만 국한된 게 아니에요. 몸 쓰는 과학, 그게 스포츠고 무술이고 다 이치가 같은 거야. 이 이퀄 엠씨 스퀘어드(E=MC²), 그게 무술과 스포츠에 다 적용이 되는 거예요. 수학, 과학의 영역과 다를 바 없는 거지. 곧 한 가지 운동을 완벽하게 이해하면 다른 운동도 다 잘할 수 있게 되는 법이라고요.”
박이 채를 어린애 다루듯 한다. 채는 박학하고 다식한 박이 입을 열 때마다 자신의 인문적 무교양이 공격받는 거 같아 매번 기분이 별로였다.
전공 공부하랴 스펙 쌓으랴 그것만 해도 죽을 지경인데, 대학 연합동아리에서 얼굴이 스친 지현이 꽁무니를 따라 십팔기 도장까지 두리번 거리다 보니 무슨 교양서 같은 것은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책들은 정본이 아니라 그냥 요약본으로 읽을 책들로 생각했다.
채가 슬슬 열이 오르고 있는 것도 나 몰라라, 박은 무술 도장에 와서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창틀에 기대 짝 다리를 척 짚고 한쪽 발은 꼴사납게도 달달 털어 가면서 아주 장단을 맞춰 따박따박 이야기를 한다.
“타이거 우즈 바이오그래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프로 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황제로 불리는 타이거는 베터런인 아버지 얼 우즈의 사상으로 팔 할이 이뤄졌다고 보면 되는데…… 얼은 타이거가 두세 살 꼬맹이 때부터 골프에 천부적 재질을 보이자 ‘내 아들은 미래에 넬슨 만델라, 간디, 부처보다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거야......”
박이 계속해 예의 잘난 체를 한다.
“그런데 전기 작가는 얼의 이런 주장을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에 비유해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것 참…… 그러니까 타이거는 두 살 반 때부터 전국 방송에 나가 골프를 쳐 보이고 천재성을 인정받았지. 그러자 얼은, 디킨스가 주인공이자 투쟁운동의 상징인 소년 핍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꿈꿨던 것처럼, 우즈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골프의 ‘골’자도 모르고 타이거 우즈 역시도 하등 관심이 없는 채는 속으로 ‘그래서요, 어쩌라고요’라고 시큰둥할 뿐이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청풍은 느닷 까까머리 고교시절이 떠올랐다. 더없이 투명한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던 도서관 2인용 책상에 앉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다가 꽂혔던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조수로 일하는, 핍의 매형 조(Joe)가 바보 같아 보이지만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얼마나 무한정으로 쏟아낼 수 있는지 작가 디킨스가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장면.
‘온화하고 정직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어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미치는지 아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람의 영향력이 바로 내 곁을 지나칠 때 나 자신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가능한 일이다.’
청풍이 대학에 들어가 원서를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다. 고교 시절 그가 읽었던 고전 속에 나오는, 머리에 각인된 문장을 작가가 실제 어떻게 표현했는지 원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조의 선한 영향력 단락 같은......
그때였다.
그런 궁리에 청풍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섰던 차에 땀으로 범벅이 된 도복이 딱 달라붙은 등판을 ‘찰싹~’ 때리는 소리가 난 것이. 가녀린 손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청풍.
“오빠~, 청풍 오빠!”
청풍은 그만 가슴이 쿵 떨어져 내렸다.
‘오빠~’ 라니!
아직까지 그를 오빠라고 부른 여자애, 아니 여성은 아직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학 시절에도 여학생들이 친하면 형, 안 친하면 선배라고 불렀지 누구도 청풍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누굴까?’
청풍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다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 때문인지 눈이 확 부셔왔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한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기며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시원하게 큰 눈에다 오똑한 콧날, 얇은 입술에 갸름한 턱선, 태닝을 한 것 같은 건강한 피부. 미인이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가씨처럼…… 그러고 보니 눈과 콧날이 청풍 자신과 닮았다. 둘이 나란히 서면 남매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보였다.
청풍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숙맥 청풍이 울그락불그락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오금을 저려야 할 상황에, 웬걸 그렇게 대범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마땅히, 사람들은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