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서울 도심 한복판, 그러니까 회사 근처에 막 리모델링을 끝낸 비까번쩍한 고층 빌딩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헬스장을 찾아 들어갔다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十八技’ 한자 현판이 내걸린 도장이 나타났다.
3년 전 청풍은 그렇게 십팔기 도장에 처음 발을 들였다.
빌딩 창문이 열려 있을 리 없어 바람이 밖에서 불어 들어온 것도 아니었을 테고, 대관절 십팔기는 또 무엇이며, 문을 열고 들어간 도장 풍경은 왜 또 살벌하게 고색이 창연한 것이냐.
“잘 찾아왔구나......”
넓은 이마 아래 붓으로 그린 듯한 두툼한 백미(白眉), 시원하게 쭉 내리 뻗은 콧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입매, 강렬한 턱선, 대추빛 얼굴에다 기골이 장대한데도 왠지 모를 푸근함을 풍기는 풍채.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노사(老士)가 기다렸다는 듯 홀로 섰는데 청풍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여 꾸벅 폴더 인사를 했다.
그러자니 노사가 어깨와 팔, 손을 차례로 부드럽게 쓰다듬어 다독였고 청풍은 그 따듯한 손길에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 왔다. 전생이라는 것이 있어서 마치 그 생애에 오랜 인연을 맺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은 항시 바르게 써야 한다. 얽매임 없이 살거라. 세상을 품어라.”
맥락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신다. 난생처음 보는 청년한테 할 소리도 아닌 데다, 문장 세 개가 각기 다른 뜻을 품고 이리저리 튀는 것이었으므로 청풍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그러고 얼마 간 섰자니 어느 순간 청풍은 가슴이 뭉클해 오더니 뭔지 모르게 마음속 깊은 그곳이 후련해지는 것이다.
“오늘은 차나 한잔하고 가거라.”
도장 옆에는 단출한 방 하나가 딸려 있다. 노사만의 공간일 터다. 집기라고는 조그만 창 아래 놓인 낡고 바랜 앤틱 원목 책상과 책장, 둘이 겨우 마주 보고 앉을 만한 티테이블이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방금까지 글을 쓰고 있었는지 원고지와 그 위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 한 자루가 정갈히 놓여있다. 책장과 그 옆 벽까지 빼곡히 쌓아 올린 책들을 얼핏 훑어보자니 무술책보다는 사상과 역사 같은 동서양의 고전 책들이 많이 보였다. 온통 한자로 빼곡한 원고지 첫머리 ‘글쓴이’ 자리에는 ‘亢龍’이라 적혀 있다.
‘항룡? 자호(自號)인가?’
이어 ‘몽블랑 만년필로 한자를 쓰다니……’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내색은 없이 짐짓 “항룡 선생님이세요?” 물었다.
노사가 답 대신에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향(茶香)이 작은 방안 가득히 향기롭게 피어났다. 항룡 선생이 말을 이어 나갔다.
옛날에 소를 잡는 이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포정(包丁). 그가 칼을 들어 소를 가를 때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음률에 딱 들어맞았다. 칼이 이르는 곳마다 뼈와 살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나가는데 거칠 바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임금이 “훌륭하도다. 어찌 재주가 이런 경지에 달할 수 있는가” 묻자 포정이 말하길 “그것은 재주에 앞선 도(道)”라고 답했다.
처음 소를 잡았을 때는 소가 보였으나 3년이 지난 뒤에는 소가 보이질 않게 되었다. 감각의 작용을 버리고 정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그 뒤로 소를 수 천 마리나 잡았고 칼은 십구 년이나 썼으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나온 것과 같았다.
“무예는 사뭇 이와 이치가 같다. 열과 성을 다해 3년의 공(功)은 쌓으면 비로소 무술을 성취할 몸과 마음의 기틀을 잡을 수 있게 된다. 해 보겠느냐?”
청풍은 어리둥절의 연속이었으나 나지막하게, 그러나 절도 있게 “네” 하였다. 러닝이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헬스장을 찾아갔다가 무어 들어본 적도 없는 십팔기에 입문하게 된 꼴이다. 그래도 운동은 운동이고, 특히나 속으로 ‘한 번 무술 같은 것을 배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십여 년 넘게 해왔으니 ‘이것도 팔자려니’ 싶기도 하였다.
“권법(拳法)은 병기기술(兵器技術)을 배우고 익히는 기초가 되고, 모든 무예의 근원이 된다.”
무예는 맨손 기술인 권법과 무기를 사용하는 병장기술로 나뉘는데, 손에 병기를 잡고 연무하는 것은 손이 연장된 권예(券藝)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부드러움(柔) 속에서 강함(剛)이 나오고, 강하면 곧 부드럽게 된다.”
더불어 여럿의 가르침이 이어졌는데, 청풍의 뇌리에는 “천 개의 초식을 펼 수 있다고 두려워 말고, 한 개의 초식이 숙련된 고수를 만났을 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는 선생의 말이 또렷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렇게 차를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항룡 선생은 마지막 말을 보탰다.
“무릇 무예를 갈고닦음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규범이 있는 법. 무덕(武德)을 숭상하고, 몸을 강하게 하며, 성(性) 즉 심신(心神)을 기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날 밤 청풍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 높이 뜬 만월(滿月)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인가? 달 주변으로 옅은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저 하늘 위에도 바람이 부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청풍은 혼자 사는 열 두 평 전세 원룸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인터넷 검색창을 켰다. 십팔기가 도대체 무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한국의 전통무예니 사도세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같은 내용들이 떴다.
그런데 항룡 선생은 어디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기풍으로 보아 십팔기 전인(傳人) 임에 틀림이 없는데 선생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항룡 선생이 아까 청풍의 어깨와 팔, 손을 어루만지던 감각이 생생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툼한 손을 통해 전해져 오던 바로 그 감각.
한없이 부드럽지만 움켜쥐려고 하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힘을 감춘 손. 촉수라도 달린 듯 착 달라붙어오던 손바닥과 손가락. 반갑게 사람을 맞는 인사치레의 쓰다듬같았지만 뭔지 모르게 제 몸의 골격과 근육을 탐색하고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이 항룡 선생이 말한 공(功)이라는 걸까.
불현듯 불세출의 축구황제 호나우두가 절정기 시절 그라운드를 누비던 광경이 떠올랐다. 빠른 속도,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 육중하면서도 유연한, 감각적인 드리블로 페널티 박스의 수비수 여럿을 그 유명한 탄력으로 귀신같이 따돌리고 대포알 슛을 성공시키는 장면 말이다.
부드러움과 힘, 그것은 진정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부드러움 속에서 강함이 나오고 강하면 곧 부드러워진다는 항룡 선생의 말.
또 하나 항룡 그 필호(筆號)는 뭘까? 주역 책에서 보았던 항룡유회(亢龍有悔)의 그 항룡을 말하는 것인가. 하늘로 치솟은 용을 말하는 것인가, 마치 윤회와 같아서 결국엔 그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뜻일까.
또 아까 십팔기 도장을 찾았을 때는 퇴근한 직장인들로 붐벼야 할 피크 타임이었는데도 도장에는 왜 항룡 선생만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왜 도장을 찾아간 것일까. 별스럽던 도장 풍경, 항룡 선생의 작은 방, 고전책들과 몽블랑 만년필, 무언(武彦) 몇 가지, 그리고 십팔기. 저녁나절에 벌어진 일인데 아주 오래된 기억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영화에서 본 장면 같기도 하여서, 머릿속이 혼란했다. 마치 단잠에 들었다가 아련한 꿈을 꾼 것처럼. 꿈은 꿈으로 남을 것인가. 청풍은 그날 일을 골몰히 곱씹어보다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