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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06화

오늘 가장 센 주먹

무림고수 K

by 무림고수 K

사건은 또 터졌다. 마치 그 해 가을바람이 청풍의 주먹을 시험이라도 해보듯 말이다.


고등학교 정문을 나와 큰 사거리를 지나면 편의점이 있는데 여기서 아이들이 컵라면과 만두, 빵 등으로 청춘의 허기진 배를 채운 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곤 했다.


편의점 바로 그 뒷골목으로는 오락실이며 당구장, 인근 대학생들이 찾는 호프집 등이 즐비했다. 비좁은 골목은 어두컴컴하고 어딘지 음습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등학생이면 공부나 하고 이쪽으로는 얼씬도 말아라’고 강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청풍은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에 가곤 했다. 펀치 기계 때문이다. 쇠줄에 높게 매달린 핸드볼공 만한 크기의 펀치볼과 허리 높이쯤의 쇠말뚝에 복싱미트를 박아놓은 것 같은 펀치볼 등 종류도 다양했다. 주먹을 냅다 질러 보거나 높이 뛰어서 발차기를 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띠띠리링~’ 하는 촌스런 반주음이 터지면서 치고 때린 강도를 알려주는 숫자가 계기판에 딱 떴다. 어린 치들이 유치하게도 그걸로 남자다움을 겨루는 것이다.


“청풍아, 오늘도 니 주먹이 제일 세나 보자. 나도 요즘 운동깨나 했거든.”


청풍은 체격이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라 팔씨름으로 치자면 반에서 두 번째 정도로 셌지만 펀치력만큼은 정말 남달랐다. 몸을 튕겨 체중을 실어 때리는 펀치는 아무리 거구라도 청풍보다 세지가 않았던 것이다. ‘핵펀치는 타고난다’는 그 본보기가 바로 청풍이었다.


태권도 공인 3단인 한 녀석이 핸드볼공 펀치볼을 화려한 뒤돌려 차기로 갈겼다. ‘짹~’ 하는 얄팍한 타구음이 났다. 박수가 터졌다.


청풍은 발차기라고는 배워 본 적이 없어서 뒤돌려차기를 시전 할 순 없었지만, 무턱대고 펄쩍 뛰어올라서 허리를 틀며 앞돌려 차기로 펀치볼을 냅다 질렀다. ‘퍽~‘ 하는 묵직한 타구음이 터졌다.


“와아! 발차기도 청풍이가 더 세구나.”


아이스크림은 항상 꼴찌가 사야 하는 법이다.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막 옮기려던 찰나 서너 명의 덩어리들이 청풍이 무리를 에워쌌다.


“꼬맹이들이 운동 좀 했나?”

“어이, 형들이 맥주 먹으러 가야 하니까 주머니에 있는 돈 다 꺼내 놔.”

“알지? 숨겼다가 나중에 걸리면 백 원에 한 대 씩이다.”


등판에 큼직하게 ‘XX대학 유도부’ 글씨를 새긴 군청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들은 청풍이 무리와는 분명 본새부터가 달랐다. 섣불리 나대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왔다.


“튀어~” 갑자기 태권도 3단이 부르짖었다.


녀석들이 너나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린다. 열린 가방에서 책이 쏟아져 나온 녀석, 구겨 신은 신발이 벗겨지자 맨발로 내닫는 녀석, 통학용 자전거는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나 살려라 줄행랑치는 녀석까지 가관은 가관이었다.


“잠깐!”

나는 듯 달리던 청풍이 멈춰 섰다. 거의 100미터를 내달려 위험에서 벗어났다 할 만했는데 한 녀석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뒤따르던 녀석들도 걱정이 되는지 머리를 긁고 섰다.


“돌아가자!”

그들 패거리 중에 공부나 좀 했지 운동신경이라고는 ‘1’도 없는 경석이 녀석이 놀란 가슴에 혼자만 뛰지를 못하고 유도부원들한테 덜미를 잡힌 모양이었다.


패거리들이 나름 의리를 지켜 오락실 앞으로 돌아가 보니 유도부원들이 돌아가며 펀치볼을 치고 있고 경석이는 몸이 굳은 듯 그들을 지켜보고 섰다.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이다 보니 다르긴 달라서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다. 타격계니 유술계니 따질 게재가 아니다.


“어랏! 넌 뭐지? 친구 구하겠다고 돌아온 거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숯검댕이 눈썹이 빙그레 웃는다.


“한 판 붙어 볼 요량이냐?”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느라 옴짝달싹을 못하고 선 패거리를 뒤에 두고 청풍이 혼자 불쑥 나선 차였다.


“형님들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때부터 일이 커졌다. ‘천파’ 청풍이 대학생 유도부와 맞짱을 뜨는 것이다.


삽시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청풍이 다니는 남녀공학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무슨 일이냐’ 떼를 지어 나서 인파가 수 십 명에 달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는 지 눈알을 굴리는 녀석들도 보였다.


“용기가 가상한데 다이다이 떠볼 자신이 있나?”

숯검댕이가 또 빙그레 웃는다.


여전히 경석이 녀석은 얼어붙은 듯 자리에 못박혀 서 있다.


청풍이 맵시 나게 스스슥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숯검댕이 역시 두 손을 앞으로 올린 채 리드미컬하게 튀어나왔다.


숯검댕이가 청풍의 앞섶을 막 틀어쥐려는 찰나 청풍이 몸을 옆으로 휙 돌리며 난데없는 호미걸이로 응수해 나갔다.


‘아뿔싸!’

그러나 단단히 자리를 잡고 선 숯검댕이는 마치 땅에 뿌리를 박은 태산처럼 요지부동. 그 사이 숯검댕이는 청풍의 오른팔을 순식간에 낚아 채 업어치기로 던져 버린 것이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청풍은 실 끊긴 연처럼 앞으로 휘익 날아갔으나 앞 구르기로 그 충격을 깨트리며 번개처럼 튀어 올라 곧바로 상대를 노려보고 섰다.


“어랏!”

일순 숯검댕이 안색이 변했다. 자기가 혼신의 힘으로 던졌는데도 상대가 충격을 하나도 받지 않은 듯한 모습에 되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상대는 팔이 잡히자 으레 그렇듯 저항하기보다 물 흐르듯 던져지는 힘을 타고 사뿐히 날아간 것이다.


유도식 낙법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풍은 낙법 같은 거라고는 도통 배워본 적도 없다.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을 뿐. 타고난 감각이 아니고서는 할 수 있는 동작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무술은 배운 거지?”

숯검댕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배운 적 없습니다.” 청풍은 “이제 그만 친구를 풀어 주세요.” 딴전을 핀다.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왜 그래. 네 친구도 그냥 우리가 펀치 치는 걸 보겠다고 남았던 건데…….”

사연인즉슨, 유도부원들이 보아하니 고등학생들이 운동 좀 한 것 같아서 장난을 걸어 본 것인데 패거리가 느닷없이 줄행랑을 치더니 얼마 뒤 청풍이를 앞세워 돌아와서는 ‘경석이를 내놓아라’ 야단법석을 떤 것이다.


뒤늦게 알려진 바로 숯검댕이는 대학 유도부 주장이자 고등학교 시절부터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낸 유도 고수였다. 결국 나중에는 세계 대회에서 메달까지 딴다.


숯검댕이가 또다시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대견하다는 듯 청풍의 어깨를 툭 쳤다.

“제대로 운동을 배워봐라. 너 같은 감각이라면 대성할 거다.”


그리하여 청풍이 패거리들은 교과서와 운동화, 자전거까지 챙기고 마침내 경석이까지 구... 내서는 의기양양 그 스산한 편의점 뒷골목을 따르릉 따르릉 벗어났는데, 당시의 현장을 목도한 인파로부터 “청풍이 혼자 국가대표 유도선수 세 명과 맞짱을 떠서 바람같이 허공을 날아 다녔”으며 “야수와 같은 천파의 눈빛에 마침내 겁을 집어먹은 유도선수 셋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는 둥 “아니다, 그날 만신창이로 너덜너덜해진 유도부원은 10여 명에 달했다”는 사실상의 ‘17 대 1’ 반론까지, 각기 다른 버전의 전설이 아직까지도 그 작은 도시에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청풍은 그날 밤 태산과도 같았던 숯검댕이의 움직임을 곰곰이 곱씹었던 것이다. "고수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가 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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