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청풍은 들도 산도, 또 도서관도 아니라면 운동장에 나타났다.
타고난 운동능력, 청풍이 하면 사실 모든 걸 다 제쳐놓고 친구들이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고 야구공을 던지고 때렸다. 청풍은 고교 1학년에 173cm까지 자란 뒤 키가 더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빨리 뛰었다. 야구공을 가장 빠른 속도로, 또 가장 멀리 던졌다. 딱히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스포츠 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단연 엄지 척이었다. 무슨 종목이건 운동을 일단 시작하면 금세 익혔다. 기술도 체력도 발군이었다. 만능 스포츠맨 이. 청. 풍.
반 대항 시합이라도 벌어질라 치면 의례 청풍이 스트라이커로 공을 찼고 선발투수와 4번 타자로 마운드에 서고 타석에 올랐다. 고교 1학년 때 한 번은 공을 차다가 상대방 골키퍼가 공이 아닌 청풍의 발목을 향해 슬라이딩을 하는 바람에 팔이 뽀각 부러진 적이 있다. 한 달 만에 깁스를 풀고 나서는 멋 적은 듯 까까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고 또다시 운동장에 나가면 그만이었다.
사건이 터진 것이 그즈음이었다.
“청풍아, 농구하러 가자!”
저녁 도시락을 후다닥 먹어 치운 녀석들이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농구공을 들고 일어선 차였다. 그 치들은 운동보다 공부에 소질이 있는 그룹으로, 사실 청풍이 한테 ‘농구하자’고 나설 부류가 아니었다.
“어, 그래.”
키 작고 몸집도 왜소한 녀석들이 아무래도 며칠간 벼르다가 청한 듯 싶었으므로 청풍이 거절을 하기 어려웠다.
막 가을로 치닫는 계절이었다. 마른 바람이 흙먼지를 날렸다.
축구 골대 뒤 얼마 되지 않는 공간에 농구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항상 아이들로 붐볐다. 그날따라 아이들이 없다 싶더니 청풍이 무리가 농구공을 던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건장한 이과반 녀석들이 나타났다.
“야, 너네 할 만큼 했으면 비켜. 이제 남은 시간은 우리가 농구를 한다.”
쪽수는 더 많았지만 피지컬이 워낙에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열이 확 드러났으니 이쪽 무리가 쭈뼛거리고 말을 못 한다.
“그냥 같이 하자. 너네 팀은 너네끼리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게임을 하면 되지 뭐.”
청풍을 아는 이과반 덩치들은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학을 온 지 얼마 안 되는 녀석이 못마땅한 듯 청풍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의도적으로 코트에서 문과반 소심이 녀석들과 계속해 몸을 부딪치고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풍아, 그만 들어가자.”
아이들이 못 이기는 척 손을 잡아끌었다.
“아까부터 꺼지라고 했지!”
그때 전학 온 덩치가 피식 웃는다.
“친구끼리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청풍이 마지못해 나섰다.
그때였다.
“뭐가 심~해”라는 소리와 함께 덩치의 주먹이 청풍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 것이. 청풍이 ‘심’ 소리를 들었을 때 덩치의 왼쪽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먼저 보았으므로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본능적으로 몸을 주저앉듯 낮춘 청풍은 허리를 꺾은 채로 반사적으로 왼손 훅을 녀석의 옆구리에, 바로 튕겨 일어서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얼굴에 꽂아 넣었다. 180cm의 거구가 그대로 뒤로 쿵 넘어갔다. 녀석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청풍에게 ‘와와와~’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청풍은 바람처럼 빨랐고 강처럼 유연했으며 산처럼 단단했다.
초가을 그날 저녁의 싸움을 목도한 녀석들 입에서 ‘청풍이 태권도 이단 옆차기로 날아올라 덩치의 면상을 날렸다’, ‘덩치는 타고난 천하장사였으나 청풍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청풍이 그때까지 태권도의 ‘태’ 자도 모르는 무술 문외한이었으므로 무슨 이단 옆차기까지 꽂아 넣었을 리 만무지만 나름 세련된 주먹질과 되는 대로의 발길질까지 하긴 하였다.
그리고 약 30여 초의 공방 사이에 우와와 덤벼든 덩치가 코가 깨지고 눈퉁이가 밤탱이가 되면서도 청풍의 몸에는 손 한번 대지 못한 것 역시 팩트였다.
당시 호반의 도시를 떠돈 풍문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전해 내려온다. “청풍이는 만능 스포츠맨이 아니라 알고 보니 타고난 천재 파이터, 바로 ‘천. 파.’였다.”는 전설이.
전설은 남았지만 청춘들의 가슴에 응어리는 남지 않았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자 청풍은 이과반으로 찾아가 밤탱이가 된 눈으로도 교실에 남아 책장을 넘기던 덩치에게 사과를 했고, 덩치는 “남자끼리의 정당한 싸움이었다”라면서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한 술 더 떠서 “남자는 남자를 알아본다”라며 되레 악수를 청했다던가. 여하간 덩치는 공부깨나 하고 운동도 곧잘 하여서 청풍과는 본디 기질적으로 통했으므로 그날부터 바로 친구가 돼 버렸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