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십팔기 도장에 다닐 수록 청풍은 머릿속이 하얘져 갔다.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 시절부터, 그러니까 30여년 씩이나 무술이 좋아 무술 수련에 푹 빠져 산 십팔기 도장 사형들이고 보니 하나같이 고수임에는 틀림없는데, 그들 각자의 몸동작을 뜯어 보자면 도통 이것이 인간의 움직임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범과 같고 용과 같다.
사형들과 손을 얽는 일이 없이 항룡 선생은 그저 “그래 그래, 그렇지” 하는 듯 예의 변함없는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한 세대 위 수제자로 “아이쿠, 허리야”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십 수년째 도장일을 도맡아 챙겨온 최한기 사범 역시 청풍의 사형들한테 ‘이래라 저래라’를 하지 않았다.
최 사범은 저녁 자리에 소주라도 한 잔 걸치고 나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라고는 했으나, 청풍이 시나브로 감화를 받아 속 깊이 따르는 나이 깨나 지긋한 그 사형들도 사범을 어려워했고, 당연히 어른으로 모셨다.
큰 스승 항룡, 작은 스승 최 사범 밑 후학들이었으므로, 청풍보다 나이가 스무 살 가량 많은 아버지뻘 고수들이었지만, 족보를 따지자면 사형은 사형이다. 사석에서야 큰 형님들로 깎듯이 모셨지만......
청풍의 이 사형들은 그저 자기들이 알아서 수련했고 그렇게 자기들만의 무술을 만들어 왔다.
청풍이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어하는 사형은 최철환.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변리사 시험에 붙고 난 이후로 로펌에서 일해온 50대 중년.
천상 백면서생의 얼굴에다 몸매가 아주 날씬한 것이 권법을 펼쳐 보일 때면 맵시가 아주 그만이다. 워낙에 무술 수련에 빠져 살아서 군살이 몸에 붙을 겨를도 없었을 테다.
한 도장에서 무술을 오랫동안 같이 수련하다 보면, 누가 최고인지가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다. 스승이 가르치는 무술은 한 가지인 만큼, 그 본모습을 가장 잘 따르는 수련자가 결국 최고의 절정고수가 되는 것이다.
철환이 그 턱이었다. 그는 무술 수련에 있어 참으로 틈이 없는 사람이어서, 자신에게 그야말로 ‘추상(秋霜)’처럼 엄격했다.
항룡 선생이 하나를 가르치면 한 달을 고민해 수련했다. 스승의 한 마디 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 말을 곱씹어 수련했고, 결국엔 자기 무술로 만들었다.
주먹 지르기 하나, 발차기 하나하나도 엄밀한 ‘틀’을 따랐다. 30년 가까이 지켜온 그 엄격함이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그의 몸동작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제대로 배워야 공(功)이 쌓이는 법이다.
철환이 그의 장기인 포가권을 시전하면, 도장 수련생들은 숨을 죽이고 고수의 몸동작을 지켜볼 뿐이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와 우열을 가르기 힘든 고수가 또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박우현. 역시 1980년대 후반 학번으로 대기업 임원인 그는 발차기가 아주 일품이다. 역시 50대 중반 나이이므로 발차기 높이도 낮아지고 파워도 떨어질 만한데, 그만은 예외였다. 180cm가 넘는 장신으로 파워를 타고난 데다, 도장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발차기에 할애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몸을 180도 돌려 차는 선풍각으로 날아오르면 마치 도장 천장까지 닿을 듯 싶다. 도약력이 어마어마하다. 발차기 속도가 다른 왠만한 고수들 주먹 스피드와 엇비슷했다. 그러면서도 힘이 실려 묵직했다. 그의 발차기는 언제나 디딤발이 견고했다. “거기서 힘이 나온다”고 항상 사제들한테 일렀다.
중소기업 CEO 추영환. 철환, 우현과 더불어 고수 3인방으로 통했다.
그는 창술이 예술이다. 일단 장창을 빼어 들고 도장을 누비기 시작하면, 휘두르고 찌르는 창의 궤적과 무시무시한 파공음으로 70여평의 도장이 꽉 차는 듯 했다. 몸이 얼마나 유연한지 어느 순간, 어느 각도로도 창을 찌를 수 있을 듯 보인다.
예전에 어느 한 고수가 있어 사과를 줄에 매달아 흔들어 놓고 그걸 꿰는 연습을 했다더니, 창끝에 붙은 창술이 어지럽게 흔들이는 모습을 보자면 영환도 공중에 던져진 사과 정도는 쉬이 꿸 듯 싶은 것이다. 그는 창 뿐만 아니라 월도, 장봉도 아주 폼 나게 휘둘렀다. 마치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명장 관우가 되살아나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듯 하다. 그만큼 그의 장병기는 장기는 장기였다.
이들은 30여년간 서로 손을 얽어 대련을 하고, 서로를 본받고, 서로를 격려해 왔으니 그야말로 피를 나눈 형제와 같았다.
가끔 술잔을 같이 기울이기도 하는데 여간해서는 만취하는 일이 없다. 그들 역시 현대를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어서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였으나 대개가 무술을 주제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에게 무술은 그저 그런 취미가 아니다. 그들의 삶은 실로 무술로 충만했다.
언젠가 도장 샤워장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청풍이 모른 척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있다.
“요즘 기식(氣息)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수련 중인가?”
하나가 묻자 다른 하나가 “한참 참공(站功)에 빠져 있다가 다시 몸을 움직여 보니 역시 동공(動功)이 나한테는 제격인 듯 싶었네.”
주고 받는가 싶더니, 남은 하나가 “정좌(靜坐)는 가히 양기(養氣)와 양신(養身)의 정공임이 틀림 없으이.” 란다.
그렇게들 이야기를 나누는데 화성이나 금성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무술에 미친 사람들이다. 공력이 깊어 졌으니 자기들 끼리만 이야기가 통했다.
그런 고수들이 각기 장기가 달랐고, 타고난 신체적 특성 또는 정신적 기질에 맞춰 무술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켜 왔으니, 저마다 멋과 맛을 가지게 되었다. 가히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다. 하여서 어느 사형의 몸동작을 따라 무술을 가꾸어 나갈지 청풍이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렷다.
그런 절정고수 사형 3인방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유독 청풍만을 아주 “예뻐라” 하면서 싸고 돌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청풍의 얼굴을 간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