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MZ 세대라면 분명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무술도장이라는 곳이 요즘 헬스장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70평 남짓한 도장은 “구리고 칙칙”한 그 자체였다. 1990년대 초 무술 도장이라면 이와 같을까!
천장에는 옛날식 일자형 형광등을 주룩주룩 달았으나 조도가 낮아서 어두웠다. 콘크리트 바닥엔 탄력이라고는 1도 없어 보이는 얇은 파란색 장판지를 깔았다. 한쪽 벽면은 수련 중 무술 자세를 틈틈이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십 수년쯤 세월의 자국이 얼룩덜룩 묻은 거울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입구 쪽 한 켠엔 검, 봉, 창, 월도 등 병장기들을 나란히 세워 놓았다. 반대쪽 한 켠으론 수련생들의 땀에 절어 소금기가 하얗게 묻은 도복이 걸린 옷걸이가 즐비했다.
좋게 말해 이채롭다 하겠으나, 실제로는 낡고 아주 닳아 빠진 풍광의 이 도장에서 사람들이 연신 치고 박았다. 발차기를 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찔렀다. 초심자들은 약속 대련을, 사범급 고수들은 호구도 차지 않은 채 실전형 대련을 붙었다.
그래봐야 등록한 수련생이 통틀어 30명 남짓.
그중 7~8명은 무려 30년 가량이나 십팔기를 수련해 온 고수들이다. 검은색 도복과 벨트가 세월의 연륜을 더해 갈색으로 바뀐 지 오래다. 초심자들이 아주 부러워 죽는 색깔이다. 그런데 고수들은 멋이 아니라 꼭 무언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심정에서 그 옛날 꼭 두 벌씩 의례를 치르듯 맞췄던 도복을 차려입고 도장에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도복 띠를 맬 때면 눈을 스르르 감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감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1~3년 안팎의 진짜 햇병아리들이었다. 누가 봐도 움직임이 무디고 둔하다. 단, 그중에 청풍만은 예외였다. 풍은 바람처럼 움직였는데 그것은 타고난 자질 그것 때문이라는 것을 고수는 물론 햇병아리들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도장에서 몸을 부딪쳐 대련을 하던 김승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도복 등줄기는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수제비 먹으러 가요.”
청풍이 밝게 웃었다. 그가 고르고 바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으면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따라나선 치들이 큰 신문사의 스포츠부 선임기자 박현무, IT기업을 창업해 나름 성공을 거둔 CEO 김승식, 유통 중소기업의 본부장 이재석, S대학의 공대생 채석환이었다. 나이로 치면 박현무가 50대 중반, 김승식과 이재석이 각각 40대 중후반, 채석환이 갓 스물한 살이다.
“풍이는 S회사에 다닌다고 했지? 요즘은 직급도 없이 그냥 무슨 무슨 ‘님’으로 호칭한다고?”
김승식이다.
“네, 벌써 몇 년 됐어요, 그렇게 부른 지가∙∙∙∙∙∙.”
“서른 다섯이라고? 그래도 석환이한테는 큰형 뻘 되는 구먼.”
“네, 벌써 8년 차예요. 회사에 들어간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쌓아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든 거 같아요.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룬 건 하나도 없는 거 같아요.”
신문사 선임기자 박현무가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로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끊고 나섰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 맘대로 화제를 돌리는 데 아주 선수다. 자기 생각만 중한 것이다.
“어느 동네고 마약라면, 마약김밥 집이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여기 수제비 집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피해 갈 수가 없어∙∙∙∙∙∙. 요즘 핫플 어쩌고 하는 곳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단 말이지.”
막 테이블 위에 차려진, 녹색 바탕에 흰 꽃무늬가 들어간 플라스틱 그릇에 가득 담긴 수제비를 수저로 듬뿍 퍼 올리면서 말했다. 십팔기 도장 인근의 노포인 이곳 수제비집 메뉴는 단출도 하여서 수제비와 꼬마김밥이 전부였다. 반찬도 그 흔한 단무지 달랑 하나.
“여긴 말이야, 우리 도장 구내식당 같은 느낌이 들어. 서울 한복판에 도무지 있을 거 같지 않은 무술도장과 식당이란 말이지. 아주 세트야 세트.”
“맛이 죽이잖아요. 장사 잘되는 게 당연해요. 전 항상 곱빼기로도 부족해요, 핫하” 넉살 좋은 채석환이 끼어들었다.
“우리 대학에서 어떻게 너처럼 멍청한 녀석이 나왔을까? 석환이 너는 헬스 해서 알통이나 키우면 딱이지. 그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 전공공부할 게 오죽 많겠냐. 양서도 틈틈이 찾아 읽고.”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너는 인마, 십팔기 같은 고급 운동을 소화할 수 있는 체질도 아니잖아?”
채석환은 사실 6개월쯤 전 도장에 나오기 시작한 여대생 김지현의 꽁무니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알았다. 도장을 찾는 횟수가 적은 박현무는 그 사실을 깜깜이 몰랐다.
“신문기자도 요즘 한 물 간 것 아녜요? 유튜브다 SNS다 하는 세상에 무슨 글이고 기사람.” 멍청하다는 소리에 열이 올랐는지 채석환이 따따부따 덤벼 들었다.
“철없는 소리!”
박현무는 신문사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었고, 정치부를 거쳐 스포츠부로 옮아갔다. ‘넘치는 말과 주장, 허무맹랑한 이상만을 좇는 세상, 고담준론 뒤로 이익을 탐하는 세태와 무지몽매한 인간들에 지쳤다’는 게 그의 말이다.
“마이크 타이슨이 왜 추앙받아 마땅한 지 알아?”
채석환이 입을 쫑긋 거리며 우물쭈물할 뿐 말문이 막혔다.
“룰이 지배하는 링 위에서는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거야. 믿을 거라고는. 거기서 정정당당 승부를 내는 거라고. 상대를 무너뜨리거나, 분초를 다퉈 기록을 세우거나 하는 것 그게 스포츠지. 트릭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어. 그게 바로 눈으로 명확히 확인 가능한 세상인 거지. 진짜 남자들의 세상 말이야.”
수저를 따그닥 테이블에 놓았다. 자못 의미심장한 표정이다.
“항룡 선생님이 아직도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정말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