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십팔기 도장은 아주 특별했다. 청풍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거나 회식이 잡힌 날을 빼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에 갔다. 사람 냄새, 도복 땀 냄새가 좋았다.
그곳에서는 일상의 불유쾌와 짜증, 걱정과 불안, 궁핍과 찌듦 같은 삶에 달라붙지 말았어야 할 이물질 투성이들이 탈탈 털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냄새.
수련생 둘이 손을 얽을 때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상대의 몸과 움직임을 탐구하고 같이 호흡하면서 인간 대 인간이라는 연민이 피어나고 호감이 싹텄다.
하여서 마약 수제비 꽃무늬 그릇이나 500cc 맥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할 때면 자기들의 고민과 살아갈 길에 대해서도 허물없이 이야기했다. 그것은 어쩌면 도장이어서, 도장 사람들과 같이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터였다.
십팔기 도장 사람들은 결국 한 통속이었다.
도장을 꾸준히 다닌 이들은 타고난 성정이 강함을 추구하지만 기실 속으로는 순두부 마냥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다. 결코 나쁘다 할 수만은 없는 ‘물러 터짐’ 그 이면에 또 다른 강함을 만들어 내기 위해 무술을 배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라며 길러진 성정이 나 혼자 보다는 남을 같이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요즘 세상에 딱 별종 소리 듣기 쉬운 부류다. 그 별종들끼리 자주 뭉쳤고, 뭉치면 같이 행복해했다.
도복 땀냄새.
혼자만의 수련은 일종의 명상과도 같았다. 땀구멍에서 끈적한 땀이 기분 좋게 송골송골 배어 나오면 손과 발에 힘이 붙었고 가슴은 차분해졌으며 눈은 밝아졌다.
두세 시간 운동을 하고 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만큼 녹초가 돼야 정상인데 몸은 한결 가뿐하기만 했다. 만약에 이렇게 10년을 더 수련한다면 무협지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일백 갑자 내공을 가진 초절정 고수가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기분뿐만이 아니었다. 청풍의 몸은 빠르게 변화해 갔다. 타고난 운동능력을 가진 만능 스포츠맨 청풍. 아니 어려서부터 ‘천파’라 불렸던 청풍이 엘리트 무술 수업을 받고 날개를 단 것이다. 신체는 더욱 고강해지고 운동능력은 한층 배가됐다.
무술 수련이란 것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AI 같은 초정밀 동작과 빈틈없는 호흡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실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정확한 개념과 공식을 대입하지 않고 고등수학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똑같다. 공식대로 제대로 배워야만 무술하는 몸을 만들 수 있다.
기본식. 처음 십팔기 도장을 찾았을 때 청풍은 기마식을 서면 1분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30분은 너끈히 설 수 있다. 호흡과 의식을 단전에 모으고 온몸을 이완시키는 수련을 통해 코어 근육은 탄탄히 자랐고 팔과 다리에 팽팽히 힘이 붙었다.
발차기.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선풍각 등 10여 가지의 발차기는 발차기 그 자체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몸통을 원활히 쓰는 수련이기도 하다.
옛말에 ‘주먹으로 삼(三) 푼을 치고 발로 칠(七) 푼을 찬다’고 하였다. 칠은 보법(步法), 그러니까 요샛말로 격투 시의 스텝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투로(鬪路). 종합 격투 방식이다. 정해진 공식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주먹을 지르고 발을 찬다. 상대와의 실전 공방 연습법이자 병장기를 다루는 몸만들기를 위한 권법술이다. 몸은 거침없이 신전(伸展)되고 움직임은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빠르되 힘차고 강하되 원활하게 된다.
“풍아, 주먹과 발차기는 마치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튀어 나가는 것과 같아야 한다.”
십팔기 고수 3인방이자 포가권의 달인 최철환 사형은 항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렇게 일렀다.
“모나미 볼펜에서 용수철을 빼내어 양쪽 끝을 모아 쥐었다가 풀어놓는다고 상상해 보자. 첫출발은 부드럽겠지만 갈수록 탄력이 붙어 마지막에 터지는 탄성이 최고조에 달하지 않겠나.”
철환 사형이 믿고 따르는 공식이다. ‘모나미 용수철처럼 쏘아라.’ 목표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뚫고 나가는 데 집중해라. 모아 쥔 용수철을 놓으면, 탄성이 용수철 원래 모양을 넘어 반대로 휘어지도록 튕겨내는 힘, 그것이 주먹과 발차기의 격발력이다.
“양발은 굳건하게 땅에 뿌리박고, 허리와 어깨를 양껏 틀어서 힘을 모은 뒤, 발로 땅을 비벼 차는 힘과 허리를 튕겨내는 힘을 모아서 주먹을 지르고 발을 차야 한다. 그래야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바위를 뚫는 힘을 격발 시켜 낼 수가 있다.”
십팔기 고수 3인방, 그러니까 권법 최철환, 발차기 박우현, 병기술 추영환은 각기 장기가 달랐으나 공통된 점이 꼭 한 가지 있었다. 고무공 같은 탄력. 세 고수는 같은 사부 밑에서 같은 공식으로 수련했으므로 자신이 타고난 능력대로 무술이 다르게 발전시켜 갔으나 핵심 요체는 결국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몸을 움직이면 고무인형이라도 된 양 어마어마한 탄력을 뿜어냈다. 50대 후반인 그들이 보이는 탄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린애들도 흉내 낼 수 있는 그냥 유연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이 아마 공(功)이라면 공일 것이다.
우현 사형은 “발차기 힘은 디딤발에서 터진다”고 했고, 영환 사형은 “창은 팔이 아니라 몸으로 찔러야 한다”고 귀에 피가 나도록 말했다. 저마다의 공을 이룬 세 고수가 문장은 달랐으나, 결국 하는 말의 핵심은 같은 것이리라 청풍은 짐작하는 것이다.
청풍은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어렵지 않았다. 천파의 기질과 체질, 움직임은 십팔기를 수련하기 위해 타고난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남들보다 익히는 속도가 빨랐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이해했고 머잖아 셋을 성취해 냈다. 속도는 가속도를 낳았다. 무술하는 몸 만들기 성취 그래프의 우상향 기울기가 가팔라졌다. 그리하여 십팔기 입문 3년이 되었을 때 청풍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본인은 그걸 스스로 알지 못했다. 항룡 선생이 풍화검결을 청풍에게 전수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