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강선화가, 그러니까 마르크 샤갈의 연인 '벨라'라는 영어이름으로 미국 플로리다 브레이든턴에 있는 에버그린 아카데미로 골프 유학을 떠난 것이 2003년이었다. 강원도 춘천의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처럼 그때 플로리다도 한껏 푸르렀다. 16세의 앳된 소녀 벨라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까닭 모를 고독이 밀려들었지만 그것도 싫지만은 않았다.
벨라는 에버그린 아카데미 골프 레인지에 섰던 첫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스윙을 좀 볼까?"
엘리자베스 모건이 다짜고짜 말했다. 금발과 은발 머리카락이 고루 섞인 50대 중반의 그녀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교습가였다. 마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 같은 사람이랄까.
벨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를 따라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재미 삼아 골프를 시작했다. 그런데 골프 천재가 따로 없었다. 연습장 레슨 프로들이 돌아가며 몇 달씩 가르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가르칠 스윙 기술이 없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런 벨라는 애초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였다. 그림과 음악을 사랑했다. 골프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에겐 스포츠도 일종의 예술이었다. 완벽한 골프스윙이란 '미적 완성'을 이룬 스윙이었다. 정확하고도 우아한 인체의 움직임. 그가 이해하는 모든 스포츠 세계에서 절대선은 바로 그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앞에서 벨라가 10여 분간 아이언, 드라이버 스윙을 했을 때였다.
"이너프(enough), 퍼픽(perfect)!"
엘리자베스는 골프 레인지 간이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말했다.
"완벽한 스윙이야, 벨라. 투어프로들 이야기를 해볼까? 그들 각기의 기술적 완성도를 따지자면 대부분 종이 한 장 정도 차이에 불과해. 프로는 프로니까. 그런데 벨라도 그들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아. 어린 나이에 엄청난 성취를 이뤄낸 셈이지."
벨라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뭣하러 왔지? LPGA를 점령한 태극낭자군에 합류하고 싶은 건가?"
"선생님, 제 스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물론 완벽한 스윙이란 존재하지 않아. 더 훌륭한 스윙이 언젠가 나오고 말 테니까. 시대를 풍미한 벤 호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는 당시 완벽한 스윙으로 찬탄받았지. 하지만 지금은 어때? 로리 맥길로이 스윙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냐 말이지.“
"선생님, 저는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저는 아름다운 스윙을 갖고 싶은 거예요."
"아름다운 스윙이라. 그럼 프로 무대에서 우승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름답고도 완벽한 스윙을 만드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면 우승이 자연히 따라올지도 모르지만요. 우승 트로피는 아름다운 스윙을 인정받는 훈장과 같을 거예요."
"벨라라는 이름... 혹시 샤갈의 연인 벨라를 딴 건가?"
"맞아요. 제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며 그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영어 이름을 벨라로 쓰기로 했어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조지아주 베리 칼리지 출신으로 인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베리 굿!"
엘리자베스는 벨라가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 안에 미국 LPGA 프로테스트인 Q스쿨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벨라는 엘리자베스 선생님을 좋아하게 될 거 같았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벨라, 골프는 결국 자연 속에서 완성되는 법이야.
네가 말하는 아름다움도 결국 자연에서 구현해야만 해.
코스를 듣는 거야.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봐. 눈을 부시게 만드는 햇볕,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 잔디에 맺힌 아침 이슬, 싱그러운 나무와 풀 냄새, 빗소리, 새소리와 벌레소리... 코스에 온전히 나를 맡기면 코스를 읽을 수 있게 될 거야. 나와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러면 냉혹한 프로세계의 경쟁도,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도, 심지어 네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스윙에 대한 집착까지도 부질없음을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게 골프의 완성이야. 나는 네가 해낼 거라고 믿어.
플로리다는 사철 내내 온화한 날씨여서 언제든 골프 라운드를 할 수 있었다. 옥스 클럽과 레이크우드 랜치 클럽은 그야말로 천혜의 코스였다.
벨라는 코스에 나갈 때마다 온화한 열대와 아열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플로리다의 숨결을 느꼈다. 산뜻한 햇살과 짙은 녹음, 잔잔한 연못, 울창한 소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진 광경은 안온함과 열정을 동시에 불러왔다. 그 속에서 벨라는 감각이 깨어남을 느꼈다. 그렇게 벨라는 자연의 빛과 소리에 집중해 스윙과 멘털을 다듬어 나갔다. 갈수록 골프가 편안해졌다. 더불어 안으로 단단해졌다. 라운드는 결국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래서 때론 고독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고독한 만큼 성숙해졌다. 더욱 강해졌고 더욱 밝아졌다. 고독이 친구가 되어 줬다.
그렇게 플로리다에서 2년을 보냈을 때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벨라, 벌써 넌 깨우친 것 같구나. 자연의 색과 소리로 골프스윙을 만들고 골프 코스와 하나가 되는 법을 말이야. 앞으로 골프게임에서 널 이길 적수는 당분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해 벨라는 18세였다. LPGA Q스쿨을 1위로 통과했다. 이른바 '박세리 키즈' 골프세대가 이룬 성취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것이었다.
이청풍이, 그러니까 고교 1학년 강선화가 좋아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자 학창 시절 만능 스포츠맨에 천재 파이터 '천.파.'로 불린 이 녀석은 2025년 지금에서야 비로소 골프를 배우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의 나이 35세.
골프 레인지에서 벨라 프로의 스윙을 직관하고, 서래마을 프렌치 레스토랑과 종로 순댓국집에서 두 번의 데이트를 하고 난 바로 뒤에 든 예감이었다.
청풍은 골프서적을 독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모든 스포츠를 배워온 방법이다. 스포츠 이론을 먼저 철저히 깨우친 뒤에서야 운동을 시작했다. 골프책을 탐독하다가 문득 항룡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무술과 골프는 몸을 쓰는 원리가 꼭 같다."
"부드러움 속에서 강함이 나오고, 강하면 곧 부드럽게 된다."
"천 개의 초식을 펼 수 있다고 두려워 말고, 한 개의 초식이 숙련된 고수를 만났을 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