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고수 K
"아버지가 평생 목숨처럼 아낀 것은 광휘와 그림 한 점이었습니다."
광휘는 그럴 것이었다. 이치로한테는 그의 아내 박서린의 분신과 같았을 것이므로.
"도대체 어떤 그림이길래?"
박현무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손으로 추켜올리며 김성환한테 물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쓸쓸한 가을날, 이치로는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에서 박서린을 처음 보았다. 투명하고도 고독한 눈을 지닌 그녀를 좇아 버스를 탔고 양평 기와집까지 따라갔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은 그녀는 처연히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치로는 가슴이 저려 왔다.
이치로는 그날 이후 인사동 화랑가를 뒤지고 다녔다. 박서린에 대해 알아볼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시, 서예, 그림을 좋아했던 그녀가 몇 년째 연담(煙潭)의 그림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연담이라면 이운(李雲) 선생 말인가요?"
최철환이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이운은 문무에 두루 통달했던 조선시대 도가의 큰 어른이다.
행연도(行然圖).
깊은 산 빼곡한 소나무숲 속 바위에 묘령의 여검객이 걸터앉아 무릎에 검 한 자루를 올려놓은 채 계곡물을 내려다본다. 연담은 정갈한 필체로 '인생은 구름과 물처럼 흐른다(人生如行雲流水)'고 적었다.
이치로는 박서린이 찾는 그림이 '행연도'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지금 세상에서 행연도의 주인을 찾는다면 그녀 말고 달리 누가 있겠는가.
이치로는 일본에서 서울로 건너오자마자 보물급 미술품 몇 점을 샀었다. 그중 하나가 행연도였다. 박서린의 조부가 집안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온 그림이었다. 유학과 선비의 조선시대에 여성 검객을 그린 그림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조부는 서린에게 말했었다.
"연담 선생이 수백 년 세월을 내다보고 선견지명으로 그린 이 그림의 주인공은 우리 서린이 같구나. 해서 우리 집 가보로 전해져 왔을 테고."
그러나 조부가 소천하자 호구지책이 없던 서린은 행연도를 인사동 화랑에서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 주시오. 그리고 광목천으로 싼 물건을 등에 멘 30대 여성이 와서 묻거든 두말 말고 그림을 내어 주세요."
이치로는 화랑 주인한테 연행도를 건넸다.
"몇 년 전 아파트 한 채 값을 치르고 사신 그림인데, 그냥 내어 주라고요?"
"위작이라고 해주세요. 진품은 종적을 감췄다고. 그림값으로는 쌀 한 말값만 받으시고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행연도는 양평의 기와집으로 돌아갔다. 박서린은 기와집 뜰 은행나무 앞에서 홀로 천광검법을 수련했다. 그를 지탱한 팔 할은 광휘와 행연도였다. 세월은 한 조각 구름과 같이 흘렀다.
그리고 서린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이치로의 존재를 알아챘다. 용문사를 찾는 것처럼 꾸몄지만 인사동 화랑가에서 광휘를 노리고 쫓아온 사람임이 분명했다.
개의치 않았다. 검법에 관한 한 박서린은 한중일을 통틀어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홀로 검을 익히고도 일당오백의 고강한 경지에 오른 것이다. 타고난 천재 검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개월이 지나도록 광휘를 탈취해 가려는 어떤 시도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치로는 얼굴이 마주치면 그저 합장을 하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 그는 서린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항시 그녀가 그리웠다. 이제 그에게 광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박서린은 용문사 천년 수령의 은행나무 앞에서 돋아오는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는 이치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이치로가 별을 보면서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치로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신 뒤 5년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박서린은 불세출의 타고난 검객이었지만 병마를 이겨내진 못했다. 신장병이었다. 이치로가 자기의 신장 하나를 내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서린은 병상에서 말했다.
"행연도가 돌아오더니 당신이 곧 내 앞에 나타났어요. 그림이 가짜든 진짜든 이제는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줬으니까요. 그동안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절대 혼자 쓸쓸히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김성환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늘 우리 삼 형제에게 얘기를 들려주셨죠. 자신의 아내이자 우리의 어머니 이야기를요. 저흰 어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머니를 만들어주신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우리를 입양하셨죠."
박현무가 말길을 돌렸다.
"아버님이 살해당하신 게 아니라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말씀하셨어요. 죽음이 닥치면 모든 게 사소해질 줄 알았다고.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고."
김성환의 아버지 이치로, 아니 김일한은 고령이 되자 신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투석을 받아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아내의 광휘를 지키고 아들들을 지키는 일만 남았다.
아버지가 아들들을 모아놓고 말했었다.
"삼 년 전 우리를 급습했던 이천일류 유파에 후지기수가 나왔다. 그 젊은 검객은 능히 일당오백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광휘를 찾아올 것이다."
"아버님이 광휘와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천광의 자' 유파 고수를 찾아가 자기살해를 부탁했다는 건가요?"
박현무는 머리회전이 빨랐다.
"'천광의 감' 유파에는 이제 우리 삼 형제만 남았죠. 그러나 천광의 자 유파에는 선대의 고수가 아직 살아 계신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그분에 의지하려 했어요. 광휘가 천광검법 절대 고수의 수중에 있다면 이천일류도 가볍게 나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김성환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죽음과 병마의 고통이 두렵지 않다고 하셨죠. 그러나 당신의 병이 깊어 갈수록 병상에 누워 힘들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이치로는 광휘를 '천광의 자' 선대 고수에게 넘겼다. 죽음에 이를 장소는 박서린을 처음 만난 인사동 메인 스트리트였다. 광휘와 함께 불세출의 검사이자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오직 한 사람 그녀에게 돌아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며칠 뒤 광휘가 화랑으로 돌아왔다.
'광휘는 박서린의 검이다'란 글귀와 함께.
경찰의 수사력이 여기까지 닿지는 않을 것이다.
최철환은 침묵했다.
박현무가 말했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의 끝을 인간의 법리로만 재단하긴 어려워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