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스윙 말이야. 이게 무술로 치자면 단 한 개의 초식 같은 거거든."
십팔기 초절정 고수 3인방 중 한 명으로 장창(長槍)의 대가인 추영환. 그가 강남의 한 골프연습장 타석에서 이청풍에게 말했다. 골프를 배우기로 마음먹은 청풍이 십팔기 도장에서 골프를 가장 잘 치는 추영환을 따라나섰던 차였다.
청풍은 항룡 선생이 풍화검을 전수하면서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천 개의 초식을 펼 수 있다는 상대를 두려워 말고, 한 개의 초식이 숙련된 고수를 만났을 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중소기업 CEO인 추영환은 골프 핸디캡이 '0'이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 뒤늦은 나이에 골프를 시작했음에도 아마추어 중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실력파. 50대 중반인 그가 타석에서 드라이브 샷을 쳐내자 주위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들었다.
"프로님인가?", "나이는 꽤 있으신 듯한데 유연성이 젊은 프로들 못지않으시네.", "부드러운 스윙에서 어떻게 저런 파워가 나올 수 있지?"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청풍이 보기에도 추영환의 스윙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뭐랄까, 유튜브에서 본 투어프로들만큼의 교과서적인 스윙 같지는 않았지만 그만의 스윙엔 또 다른 탁월함이 분명 엿보였다. 마치 그가 장창을 부드럽게 휘두르다가 일순, 섬광처럼 목표를 찔러 들어가는 듯한 스윙이랄까. 스포츠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정수가 깃들어 있다고 청풍은 생각했다.
골프연습장을 나서며 청풍이 물었다.
"투어프로들은 사형보다 골프를 더 잘 치는 건가요?"
"헛허허!"
추영환이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풍아, 그들은 무술로 치자면 일당백이야. 나 같은 사람 백 명과 붙어도 이긴다는 말이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븐파 정도 실력의 아마추어 고수 백 명이 투어프로 한 명과 PGA룰로 시합을 벌인다면 투어프로가 1등을 차지할 확률이 거의 백프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 고수라고 하면 골프클럽 챔피언을 들 수 있다. 특정 골프장 회원권을 가진 아마추어들 간에 매년 시합을 치러 우승을 차지한 자. 이렇게 우승한 전국 골프장의 클럽챔피언들이 모여 최종 챔피언전을 치르는데 여기서 우승을 차지한 아마추어 최고수는 매년 KPGA 대회 출전권을 얻는다. 이 우승자는 명실상부한 아마추어 최고수지만 최근 5년간 출전한 대회에서 모두 꼴찌를 면치 못했다. 그만큼 프로의 벽은 높다.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평생 골프를 쳐온 사람들이 투어프로들이다.
"골프 역시 하나의 기예이고, 그 세계도 무술 못지않게 심오한 세계라고."
추영환이 골프 캐디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청풍과 연습장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 때다. 각목과 야구방망이, 사시미칼로 무장한 십 수명의 덩치 큰 건달들이 골프연습장 앞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가더니 창문과 집기들을 두드려 깨부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역시 각기 무기를 챙겨든 일단의 무리들이 곧 들이닥쳤고 술집 앞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백주대낮에 강남 상점가에서 벌어진 폭력조직 간의 싸움. 몇몇은 필히 중상을 입을 것이고 시민들의 피해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추영환이 캐디백을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드라이버를 뽑아 들더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추영환은 자신과 함께 십팔기 고수 3인방인 포가권 최철환, 발차기 박우현과 마찬가지로 이미 십여 년 전에 일당백의 무예 경지에 올랐다.
'쉬익!'
짧고 간결하지만 무시무시한 파공음. 추영환이 자신의 장기 창법인 용진신창(龍震神槍)을 시전해 나갔다. 그가 5성 정도의 공력만을 뽑아 올렸는데도 폭력배들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초식 천뢰일섬(天雷一閃). 추영환이 몸통을 반쯤 틀더니 허리를 튕겨 드라이버를 강하게 찔러 들어갔다. 각각 어깨와 옆구리에 일격을 맞은 두 명의 덩어리들이 '으윽' 신음을 내뱉으며 쓰려졌다. 추영환이 곧바로 몸의 회전력을 끌어올려 드라이버 샤프트를 좌우로 크게 휘두르자 두세 명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자 폭력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추영환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고수의 출현에 놀란 폭력배들이 피아 구분 없이 합동작전에 나서기라도 한 듯이.
2초식 환영도살(幻影屠殺). 전장에 홀로 선 장수가 마치 무신 관운장이 현현한 듯 상대 군사들을 압도하며 도륙하는 초식. 추영환은 드라이버를 창처럼 좌우 상하로 빠르게 휘둘러 상대 무리의 시야를 혼란시킨 뒤 쉼 없이 찌르기와 베기를 구사하자 적들이 우당탕탕 보릿자루 쓰러지듯 했다.
그 때다. 장검을 허리에 찬 청년 하나가 조용히 추영환의 뒤로 다가섰다.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압도적 체격의 폭력배 무리와는 달리 가냘픈 체형의 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달빛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조용히 움직였다. 제대로 무술을 수련한 고수 같았다.
청풍이 캐디백에서 아이언 하나를 뽑아 들었다. 행여 추영환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사각지대로 돌아 들어가는 청년 검객을 놓칠까 우려한 것이다.
청년 검객은 청풍과 눈이 마주치자 가만히 검을 뽑았다.
절제된 발검. 한 치의 동요도 없는 고요한 눈빛.
조선세법 24세 중 요격세(腰擊勢). 청풍은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서 아이언을 검처럼 왼편 허리로 가져오더니 연이어 왼발이 앞으로 나가는 동시에 아이언을 상대 허리를 향해 쳐 나갔다. 단순하지만 빠름과 힘을 두루 갖춘 일격.
그러나 상대는 칼등으로 아이언을 가볍게 쳐낸 뒤 청풍의 어깨를 향해 비스듬히 검을 쳐왔다. 흔들림 없는 깨끗한 검선. 고수다.
청풍은 진검을 든 상대를 마주한 경험이 없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단전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청풍은 그 힘을 모아 아이언을 들어 올렸다. 아이언이 검처럼 춤을 추었다. 큰 원을 반복해 그리다가 직선으로 쏘아 들어갔다. 빛처럼 빠른 가운데 산처럼 묵중한 일격. 풍화검 제1초 소요유(逍遙遊). 상대 검객이 검을 허리쯤까지 들어 올렸으나 청풍의 검기에 밀려 '펑' 하고 뒤로 네댓 걸음을 날아간 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고요했다.
이때 경광등을 켠 경찰 차량들이 몰려들었다. 조직폭력배들이 몸을 추슬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청년 검객 역시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풍아, 괜찮으냐?"
추영환이 다급하게 물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사형."
추영환은 청풍이 풍화검으로 상대 청년 검객과 겨룬 마지막 일격을 보았다.
추영환은 그 청년 검객이 정검(精劍)을 수련한 고수라고 말했다. 아직 검의 정수를 깨닫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무서운 검객이 될 거라고 했다. 조선시대 3대 검객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도인(道人) 정동화가 창안했다는 정검 문파. 그 문파의 고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풍은 청년 검객의 눈빛을 떠올렸다.
'무서우리만큼 초연한, 그러나 살의는 품지 않은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