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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풍화검 24화

살아있는 검을 쓰는 자여!

by 무림고수 K

"조선의 명검 담월(淡月)이 곧 세상에 나올 거라고?"

서울 신촌의 십팔기 도장. 토요일 오전 텅 빈 도장에 십팔기 절정고수 3인방인 포가권 최철환, 발차기 박우현, 장창(長槍) 추영환이 티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았다.


전날 저녁 강남 상점가에서 수십 명의 조직폭력배 무리를 용진신창(龍震神槍) 창법으로 쫓아 보낸 추영환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얄팍한 두께의 책이 한 권 올려져 있다. 매우 진귀한 한지로 만들어졌으나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책 표지에는 한자로 '劍(검)'이라고 적혀있다. 유명 검객이 쓴 듯 필체에 힘이 넘쳤다. 조선시대 최고의 검 명인인 유한(幽寒) 최현이 쓴 검보.


최철환이 쾌검 유파인 천광(天光)과 두 자루의 칼을 함께 쓰는 일본의 이천일류(二天一流) 문파 간의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종로경찰서장에게 펼쳐 보였던 책이다.


유한 선생은 검보 첫 장에서 밝힌 바 있다.

"필생의 공력과 혼을 담아 여기 세 자루의 검을 지었다. 검의 생명은 내가 불어넣었으되, 이를 쓰는 자가 검을 완성할 것이다."


홀로 능히 오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공력을 갖췄던 천광 유파의 여성검객 박서린이 유한 선생의 첫 번째 검 '광휘'의 주인이었다. 그 두 번째 검이 바로 담월이다.


"소상히 이야기를 해 보시게."

박우현이 추영환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최철환은 입을 굳게 다문 채였으나 그 역시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검 유파의 청년 고수를 보았네. 아직 정수를 익히지 못한 듯했는데 타고난 자질만 놓고 보자면 청풍과 맞먹을 듯 보였네."

박우현이 다시 물었다.

"그의 검법을 똑똑히 보았는가?"

"단 1 초식만 보았네. 그건 분명 태청(太淸) 검법이었네."


태청은 조선시대 3대 검객으로 꼽히는 도인 정동화가 창안한 문파다. 수양과 양생을 기본으로 하는 도교 문파인 태청은 세상에 그 검법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추영환이 말을 이었다.

"그 청년은 달빛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고요히 움직였어."

최철환이 말을 받았다.

"그가 쓴 초식은 어땠는가?"

"절제된 발검과 깨끗한 검선, 침잠한 눈빛."


박우현이 물었다.

"공력은 어느 정도로 보였나?"

"4성 정도."

"그가 쓴 검은 담월이 아니었다고?"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검이었네. 날도 세우지 않은 수련용 칼이었어."


십팔기 고수 3인방은 잠시 침묵했다.

박우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태청 문파의 선대 고수가 그 청년 검객을 키운 거겠지."

"맞아. 그의 뒤에는 절대고수가 있네."

최철환이 말을 받았다.

"그 청년 검객이 후일 담월의 주인이 될 거란 말이지?"

추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철환이 유한 선생의 검보를 펼쳤다.


달빛이라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검 한 자루가 그려져 있다. 다음과 같은 발문이 적혀있다.


담월(淡月). 정(靜) 속에 동(動)을 가둔 검이다. 순철만을 골라 고요히 녹여내 새벽이슬로 담금질했다. 마음을 비우면 천기(天氣)가 그 속에 흐르니 정순한 검(劍)은 곧 도(道)가 된다. 태상노군(太上老君) 같은 이가 검을 든다면 마땅히 허공의 한 톨 티끌도 베어내고 한 줄기 바람까지 자를 수 있으리라. 3년의 무위(無爲)로 이 검을 지었다.


추영환이 침묵을 깨고 말을 이어갔다. 흥분한 듯 말이 떨렸다.

"풍이가 풍화검을 사용했네."


최철환과 박우현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풍화검 초식으로 청년 고수에 맞섰다는 건가?"

"풍화검 제1초 '소요유'였어."

"다른 초식도 구사했나?"

"그 둘은 단 일검만 겨뤘으니 다른 초식은 사용하지 않았네."


"풍이가 구사한 풍화검은 어느 경지였는가?"

"3성 수준으로 보였어. 그것만으로도 홀로 능히 오십 명의 검객과 맞설 공력을 갖추고 있었고."


십팔기 초절정 고수인 이들 3인방도 풍화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유한 선생이 검보에서 밝힌 다음 대목이 그들이 아는 풍화검결의 전부다.


풍화검(風花劍) 제1초 소요유(逍遙遊). 검이 살아있는 듯하다. 큰 원을 반복해 그리다가 직선으로 쏘아 들어간다. 빛처럼 빠르고 산처럼 묵중하다. 그러나 무엇이 빠르고 느리며 또 무엇이 무겁고 가볍단 말인가. 삶과 죽음은 어떠한가. 검 앞에 그 경계가 존재하는가. 활인검(活人劍). 바람에 매화 꽃잎이 날린다. 여기 천지 만물의 근원적 힘을 품은 소요유 초식에 탄복해 내 일생의 마지막 검 '항룡(亢龍)'을 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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