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을 찾다, 삶의 중심을 잡다
플랫폼의 그림자
지하철 승강장 한복판, 발끝으로 겨우 선 채 미동도 없는 한 남자의 그림자,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 턱선에 걸쳐있는 찰나에도, 귓가엔 아르헨티나의 아득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심한 발걸음들이 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지만, 마치 세상과 단절이라도 된 듯, 오직 그 고독한 리듬에만 몸을 맡긴다.
십수 년 전, 뜨겁고도 은밀한 그림자, 그때 그 남자.
바로 나였다.
붉은 문 너머 우주
햇살이 길게 쏟아지던 어느 휴일 오후, 도서관 서가를 배회하던 내 손끝에 우연처럼 '탱고 레슨'이란 책이 잡혔다. 그 책장을 넘기는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듯, 내 안에서 조용하지만 격렬한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홀린 듯 책을 덮고 나는 곧장 근처의 한 탱고 강습소를 찾아갔다.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붉은색의 커다란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그 안은 정말이지 전혀 다른 우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발아래로 묵직한 탱고 선율이 숨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은 춤추는 이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고, 그들은 서로의 심장을 껴안은 듯 다정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심장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씨가 지펴졌다. '아, 나도 탱고를 추고 싶다!'.
삶의 스텝을 밟다
그러나 문 하나를 넘어선 후 맛본 전율 뒤에는, 냉혹한 현실의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초보인 나에게 탱고 수업은 생존게임이었다. 앞사람과의 간격은 늘 불안했고, 뒷사람의 움직임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내 발뒤꿈치를 노렸다.
이런 난국에 음악에 맞춰 배운 동작까지 해야 했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탱고 음악을 뒤로한 채 다리는 반박자 늦게 따라가고, 리드를 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오히려 파트너에게 이끌려 다니는 상황. 그날 리드한 건 내 파트너의 작지만 너무나 선명한 탄식이었다.
탱고는 스텝의 춤이 아니다. 한 발에 온몸의 무게중심을 온전히 실어 지구와 대화하며 두 사람이 하나의 축을 만들어 가는 균형의 예술이다. 그 사실 하나가 내 일상을 조금씩, 그러나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하철 승강장의 유리 속에서, 아침 세면대 앞 희뿌연 거울 속에서, 나는 무심히 한쪽 발로 서서 나만의 중심을 찾았다.
오직 내 몸의 미세한 흔들림과,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지면, 그리고 심장이 이끄는 소리만 존재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텅 빈 바닥에서 탱고 음악에 맞춰서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이따금 한강변을 따라 숨이 차오르도록 달렸다. 건강한 몸이 뒷받침되지 않는 열정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그것은 심장 깊은 곳,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의 부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어떤 미지의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알 수 없지만 거역할 수 없는 소리. 나를 미치도록 몰아세우고, 또 따스하게 끌어안는 그 울림을 따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갈 뿐이었다.
왜 그토록 애썼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명쾌하게 답할 수 없다. 그때의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온전히 마음과 영혼까지 쏟아붓고 싶은 일을 만났을 뿐이다. 단지 '잘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탱고라는 거대하고 매혹적인 미지의 우주를 행해 기꺼이 내 의지대로 나아갔던 것 같다.
춤추는 자아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의 몸은, 마치 동면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실루엣이 놀랍도록 선명해진 것을 발견했다. 어깨는 펴지고, 자세가 좋아지고, 움직일 때마다 라인이 살아났다. 일상의 작은 동작 하나에서도 '폼'이 중요하듯, 비로소 발현된 아름다운 '폼'이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는 단순한 연습, 바로 한 발로 균형 잡기가 있었다.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단단한 힘,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균형감각이 놀랍도록 좋아졌다.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빙판 길 위를 미끄러지듯 걸으면서도 더 이상 넘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지어 책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펜을 본능적으로 낚아챌 만큼 순발력도 좋아졌다.
마치 최첨단 고성능 엔진을 탑재한 슈퍼카처럼, 나의 몸이 나를 밀어 올렸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난 듯한 느낌. 단순히 몸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나라는 한 인간이, 내 안의 가장 깊은 본질이 한 단계 비상하는, 영혼의 도약이었다.
탱고는 단지 몇 가지 동작을 익히는 행위 그 이상이었다.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내 안의 여린 심장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낯선 사람을 안은 채 소통하는 과정 속에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관계의 소중함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배우는 훈훈한 경험이었다. 엉성했던 내가 조금씩 중심을 잡아가면서 점점 당당해지는 자신과 마주하는 일은 특별한 기쁨이었다.
탱고로의 초대
숨 쉬듯 고요하고, 심장처럼 강렬하며, 때로는 꿈처럼 아련한 탱고 선율이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첫걸음이 당신의 인생을, 가장 아름다운 무대 위로 이끌어 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삶을 리드하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탱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