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이 May 04. 2016

[모노노케 히메]는 생태주의 영화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오해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자연의 기교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모모노케 히메는 몇 번을 봐도 이해불가한 영화였다. 이번에 또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몇 번째 보는지도 모르겠음). 모노노케 히메 이전과 이후의 미야자키로 나뉜다고 평가될 만큼, 미야자키 하야오 필모그래피 중 단연 이질적이고 차별화되는 작품이다. 일단 모든 인물과 사건 등의 이미지가 너무나 뚜렷해서 메시지가 강렬하다는 점이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지 더욱 미궁에 빠져버린다는 점이 그러하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는 사실 각각의 인물이나 대상들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아리송하다. 다만, 그 작품이 어떤 결론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선명하게 읽혔다. 어느 쪽이나 모순적이지만, 특히 모노노케 히메는 너무나 명징한 이미지에 대비되는 부정확하고 모호한 메시지가 더욱 역설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 '결론없음' 혹은 '알 수 없음'이 다른 하야오의 작품에 비해 나를 더욱 이 작품으로 빠져들게 한 듯하다.


이 영화를 잘 읽기 위해서는 몇 가지 페이크를 피해야 한다. 일단 첫째 페이크는 제목 모노노케 히메다. 나 또한 감독이 제목으로 정한 만큼 가장 중요한 인물이 모노노케 히메일 것이고,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자연주의 내지는 생태주의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영화는 이분법적으로 비틀어져 버린다. 정말 생태주의가 감독의 의도였다면, 에보시가 죽고 옷코토누시와 모로가 살았어야 맞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정반대이다.


제목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애초에 미야자키는 영화의 제목을 '아시타카'로 정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기존의 필모그래피가 거의 모두 여자 이름이 제목으로 쓰였고 또한 여자가 주인공이었는데, 이번에 제목을 아시타카로 정하면 너무 이질적이라 회사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제안한 제목은 모노노케 히메였고 미야자키는 오케이했다고. 쉽게 말해 모노노케 히메라는 제목은 감독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있는 관성적인 결과물일 뿐, 실제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영화를 제대로 읽으려면 처음의 제목 '아시타카'에 눈길을 줘야 한다. 결국 작품의 주인공은 단연 아시타카이며 그의 선택과 행동이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둘째 페이크는 산의 정체성이다. 영화를 에보시 vs 산의 구도로 읽는다면 에보시는 인간 대표로, 산은 자연 대표로 읽힌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에보시 대 산의 대결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에도 그랬지만(마을을 습격하는 사무라이 장면은 인간 대 인간의 대결구도이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수많은 대립구도가 나타난다. 국왕과 에보시의 마찰, 에보시 마을의 철을 뺏으려는 다른 막부 세력과 에보시의 대결, 숭숭이와 늑대의 대립, 늑대와 멧돼지의 갈등 등 대결구도는 도처에 널렸다. 마치 세상에 널린 것은 갈등이며 그것을 끝맺을 방법은 근본적으로 부재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일단, 이 영화를 에보시 대 산 혹은 인간 대 자연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본다면 산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산을 인간으로 봐주길 바라는 듯한 장면이 몇 번 등장한다. 아시타카가 산에게 아름답다고 했을 때 흠칫 놀라는 반응, 아시타카가 장신구를 주었을 때 아름답다고 말하며 목에 차는 행동 등은 완연히 사람의 모습이다.


셋째 페이크는 시시신의 정체성이다. 물론 시시신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맞다. 하지만 생사를 쥐는 신이라는 이미지에는 몇 가지 오해할 만한 지점이 있다. 첫째는 시시신이 자연의 편일 거라는 착각이다. 등장인물인 옷코토누시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믿음이다. 시시신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시신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바닥 밑에서 피어났다 금세 져버리는 온갖 꽃의 이미지에서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생명만큼 죽음도 중요하다. 둘째는 시시신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목을 잃은 시시신은 자신의 목을 찾기 위해, 즉 자신의 생명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죽여버린다. 아마 이것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이미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생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생의 유지를 위해서는 그 생의 무게만큼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시신을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그 무게만큼, 즉 시시신이 관장하는 세상 만물의 삶을 죽음으로 등치시켜야 한다.


사실 이 메시지는 이미 영화의 첫 씬에 등장한다. 재앙신이 아시타카의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 아시타카는 재앙신에게 분노를 거두고 정신을 차리길 권하지만 이미 영화 속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선택이다. 결국 아시타카는 마을 전체의 생존을 위해 재앙신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재앙신도 살고 마을 주민들도 모두 사는, 그런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재앙신만 살거나 마을주민들만 살거나 둘 중 하나다. 사막에 사자와 토끼 단 두 마리가 있다면 둘 다 사는 경우는 결코 없다. 사자만 살거나, 토끼만 살거나, 둘 다 죽거나다. 그것이 자연의 본원적인 법칙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대립이다. 그래서 인간끼리도, 짐승끼리도 대결을 벌인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로 가족과 옷코토누시 일족을 모두 죽이고 아시타카와 산, 에보시를 살리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페이크, 감독을 성인군자로 보아온 우리의 착각이다. 인간과 자연,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감독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가 곧 작품 속 아시타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뜻 에보시의 문명화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되살아난 시시신을 다시 죽임으로써 숲을 부활시킨다. 하지만 아시타카는, 단일한 육체를 지닌 시시신의 죽음이 곧 신 자체의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 그 자체가 신이라고. 우주만물의 존재와 관계, 그 모든 법칙이 신 그 자체이다.


신은 죽었지만. 인간에 의해 점점 자연은 파괴되어 가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인간 또한 자연이라고.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고. 이것이 아마 인간으로서의 감독이 인간으로서의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차선의 답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신을 못 보는 자가 살아남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