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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22. 2016

티 없는 마음에 깃드는 영원할 것만 같은 허구적 사랑

진짜 사랑은 먼지투성이다


"내가 착하다고?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초반부. 회사를 땡땡이 치고 몬탁의 바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타박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지금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른다. 이 순간 보이는 겉모습과 이름이 전부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 상대가 얼마나 악하고 이기적이고 유치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두 번째(?) 첫 만남에서 그렇듯, 첫 번째(!) 첫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대부분의 대상은 모르는 사람이다. 소개팅에서 만났든, 길이나 지하철에서 지나치든, 처음 나가는 모임에서 마주쳤든, 신학기 첫 수업에서 보았든, 이직한 회사의 첫 출근날 알게 됐든 간에. 기존의 내 인간관계 목록에 없던 완전한 뉴페이스다. 이미 내가 알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왜 모르는 사람에게 끌릴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이, 실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한다고 믿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상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진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누락된 빈 공간에는 나만의 환상이 대신 끼어든다. 그는 착할 거야, 성실할 거야, 센스 있고 항상 매력적인 태도를 유지할 거야, 같은 망상 말이다. 우리는 그 망상을 사랑하면서도 상대를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랑은 줄어든다. 이토록 놀라운 역설. 만나는 시간이 늘어나고, 추억이 쌓일수록 그 사람이 지겨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터널 선샤인]의 역접식 진행은 대단히 현명한 구성이다. 헤어진 후-->이별 직전-->권태기-->연애 절정기-->연애 초기-->첫 만남으로 갈수록 오히려 애뜻함과 사랑의 감정은 더할 수 없이 커져간다. 영화의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건 현실의 시간과는 반대다. 현실 속 사랑도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 대부분의 사랑은 우리의 바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현실의 시간으로 돌아와서. 영화 속, 아니 더 정확히는 꿈 속 조엘의 사랑이 역순으로 진행되면서 사랑이 더 깊어지는 데 반해, 우리의 지난 모든 사랑이 시간이 지날수록 권태와 증오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닥터 하워드에 대한 매리의 사랑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매리는 이미 닥터 하워드와 불륜을 치렀고, 불행한 이별을 맞이하여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 ‘라쿠나’에서 기억을 삭제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매리는 또 다시 닥터 하워드에게 빠져든다. 닥터 하워드를 두 번째로 유혹한 밤에 매리는 니체의 경구를 인용한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망각하기 때문이다."

 

저 말은 정확히 매리 자신에게 해당한다. 이걸 영화의 내러티브에 맞게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망각하는 자에게 사랑이 있나니 상대방의 진실한 모습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매리가 다시 닥터 하워드에게 매료된 이유는, 매리가 하워드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만 그가 이런저런 사람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닥터 하워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경구를 외우며 유식하게 보이려 애쓴다. 이때 매리는 닥터 하워드를 사랑하는 것인가, 매리의 망각 속 가상 인물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이내 드러난다. 닥터 하워드의 아내가 뒤따라와 진실을 폭로한다. "네가 가져. 이미 가졌었지만." 그리고 매리는 닥터 하워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는다. 닥터 하워드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된 순간, 매리의 사랑은 수치심으로 바뀐다. 우리는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상대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위의 경구를 반대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기억하는 자에게 사랑이 없나니 상대방의 진실한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더 많이 만날수록 그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는 이유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도 함께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나쁜 습관들, 편견, 유치하고 창피한 행동들,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과거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모습, 부도덕한 행실들. 알면 알수록 나를 실망시키는 것투성이다. 그를 앞으로도 나는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한 걱정이 머릿속에 자라날 때 우리는 이별을 생각한다. 사랑의 끝이 필연적으로 실연이라면,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하는가.

 

이제, 두 커플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매리-닥터 하워드 커플과 조엘-클레멘타인 커플이다. 상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제 막 사랑이 시작하려 하는데.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연애를 통해 서서히 깨져야 하는데, 시작과 동시에 그 환상이 무참히 깨져버린다. 지금 나는 당신을 알아버렸다. 당신에 관한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도. 당신과 나 사이의 숱한 다툼과 미움마저도. 나를 증오하고 모욕하는 모습까지도. 이때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인가. 매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나는 매리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라거나 닮고 싶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닮고 싶은 쪽은 조엘과 클레멘타인 커플 쪽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버렸음에도 결국 사랑을 택한다. 그 끝이 지난 실연과 다를 바 없는 고통스러운 이별일지라도 괜찮다.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영화는, 진짜 사랑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여주려 한 듯하다. 사랑에 관한 메시지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매리의 선택을 대비적으로 보여준 것일 터이다.

 

상대방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혹은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사랑은 허구적 사랑이다. 반면 상대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택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다. 환상을 쫓는 불나방 같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쾌락이다.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예쁘고 좋은 것만 사랑하겠다면 그것만큼 이기적인 태도도 없다. 추하고 나쁜 것도 사랑하고 껴안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완전한 사랑이다. 그래서, 끝내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별까지 감수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전체이다. 사랑이 시작할 때의 설렘과 달콤함은 사랑의 씨앗이지만, 이별 후의 고통스럽고 애틋한 기억과 달라진 나의 삶은 사랑의 열매이다. 그것까지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그 사랑은 성숙한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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